[기호, 인간 소통의 열쇠] 대중문화의 기호학 C.S.퍼스와 기호학

5. 대중문화의 기호학

 

1985년작 영화 <백투더 퓨쳐 I>에서 주인공 마티는 30년 전 과거로 거슬러 가는 시간여행을 한다. 1955년에 도착한 마티가 아직 십대인 엄마의 집에 방문한 장면에는 TV가 놓인 거실이 나온다. 1950년대를 묘사하는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것이 구식인 반면, 온 가족이 함께 바라보는 TV1980년대뿐만 아니라 21세기 현재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50-60년대는 구미의 각 가정에 TV가 보급되던 대중문화 폭발의 시대였다. 록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가 전대미문의 인기를 구가했던 것은 TV라는 강력한 영상미디어 덕분이었다. 첫 등장이후 TV는 쉴 새 없이 뉴스, 드라마, 엔터테인먼트쇼, 상업광고를 일방적으로 송출하며 대중의 일상생활 속으로 급속히 침투해 들어갔다.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대중문화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학계의 일각에서 문화연구라는 분야가 떠올랐다. 20세기 중반 영미권의 문화이론가들은 시대에 맞게 수정된 맑스주의로 무장하고 매스미디어가 어떻게 대중의 사고를 교묘하게 조종하는지 비판했다. 동시대 문화연구가 기호학의 범주에 귀속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루이 알튀세르 같은 구조주의적 맑시즘을 수용하거나 후기구조주의 사상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기호학적 면모를 띠고 있다.

롤랑 바르트는 <신화론>(1957)에서 다양한 문화적 양식들을 분석함으로써 현대인의 삶에 편만한 신화들에 대해 고찰한다. 더 이상 초월적인 존재를 믿지 않게 된 현대에 이르러 인간 이성이 신적 능력을 대신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신화 같은 허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현대의 신화는 다름 아닌 부르주아계급이 유포시켜온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다. 바르트는 문학, 예술, 영화뿐만 아니라 일상적 대화, 뉴스보도, 결혼식, 요리에도 신화가 스며들어 있다고 말한다. 현대적 삶을 구성하는 모든 문화적 형식들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그것들이 특정 주체가 생산한 인공물임에도 마치 본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움을 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고는 어쩌면 가장 미묘한 형식의 신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광고가 실존 인물과 실제 사물을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기록물로 보여줌으로써 홍보문구의 도취적 효과를 그 제품이 진짜로 갖고 있는 것처럼 소비자를 현혹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테니스의 전설, 국제적 수퍼스타, 아빠라는 문구가 크게 쓰여있는 벤츠 광고를 보자. 유명한 테니스스타 로저 페더러나 벤츠 자동차를 모르는 사람에겐 이런 문구나 이미지가 그저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만 읽힐 것이다. 바르트는 이미지의 두 가지 메시지를 구분하면서 그중 문자적 의미의 층위를 코드 없는 도상적 메시지라고 부르고, 소쉬르를 따라 이 첫 번째 기호를 언어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페더러를 알거나 그에게 열광하는 스포츠팬에게 벤츠 앞에 서 있는 페더러의 이미지는 단지 문자적 의미로만 다가가지 않을 것이다. 페더러가 홍보하는 차종은 운전자를 위한 세단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SUV. 광고의 언어적 메시지와 함께 SUV 앞에 선 페더러의 이미지는 전설적인 테니스 스타에게 명예만큼이나 아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암시하고 있다. 이 광고는 남성소비자에게 이 차를 구입하면 페더러처럼 유능할 뿐만 아니라 자상한 아빠가 될 것 같은 동일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이 벤츠 광고는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함으로써 중산층 소비자들의 가부장적 가치관에 부합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처럼 심층적인 의미를 코드화된 도상적 메시지라고 하면서 이 두 번째 기호를 신화로 규정한다.

 우리가 즐겨보는 TV 드라마나 광고영상은 반복적으로 행복한 가족의 외양을 그려내면서 단지 가정의 소중함을 강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사회적 역할을 학습시키는 기능을 수행해왔다. 대중영화도 이에 못지않게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존속에 기여해왔다. 로라 멀비는 자크 라캉의 후기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에 기대어 헐리우드 주류영화의 남성중심주의적 시각 기제를 해체하고자 한다. 가령 <돌아오지 않는 강>(1954)의 마릴린 먼로의 관능적 신체는 시선의 주체인 남자주인공뿐만 아니라 남자주인공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남성관객의 시각적 쾌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두운 극장의 남성관객들은 일종의 관음증적 환영을 즐기는 동시에 유아기적 나르시시즘을 탐닉한다. 즉 마치 거울단계의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스크린을 바라보는 남성들은 남자주인공의 행위를 자신의 것으로 오인하면서 쾌락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절시증(scopophilia)과 나르시시즘은 남성관객에게 단지 보는 즐거움을 넘어, 여자주인공을 성적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통제 하에 두는 쾌감을 안겨준다. 능동적 시선의 주체로서 남성과 수동적 응시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설정은 오랫동안 주류 상업영화를 지배해온 기본 구도가 되어왔으며, 이러한 관행은 가부장적 질서를 공고히 하고 남성의 우월성을 합리화하는 암묵적 수단이 되어왔다.

이제는 여성캐릭터의 능동적 역할을 부각시키거나 여성주의적 소재를 다룸으로써 큰 호응을 얻은 사례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델마와 루이스>(1991)<디 아워즈>(2002) 같은 영화가 그런 예에 속할 것이다. 더욱이 인터넷이 TV보다 우세한 미디어로 자리매김한 오늘날 거대 자본의 일방통행식 메시지 전달력은 크게 약화되고, 문화콘텐츠 생산자와 소비자의 상호소통이 매우 활발해졌다. 반세기 전과는 상황이 많이 변했다 하더라도,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시키는 신화적 기제가 TV드라마나 영화 같은 대중적 문화형식에서 아직도 자주 발견된다. 남성관객의 성적 욕망에 부응하고자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다수 걸그룹의 댄스음악이 그 단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바르트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신화라고 부른 것은 실상 소수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위한 체제인 자본주의가 문화의 탈을 쓰고 자연을 가장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가부장주의 신화 또한 대중문화 곳곳에 산포된 채 남성지배적 현실을 은폐하는 보이지 않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

# 2015년 가을학기 성신여대학보에 총5회에 걸쳐 연재한 비전공자를 위한 기호학 시리즈, [기호, 인간 소통의 열쇠]를 마무리합니다. 기호학이 유행했던 시기가 20세기 중후반이라 전공자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이론과 사례들입니다만, 일반 교양인을 위해 나름대로 재구성했니다. 퍼가실 분들은 출처를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기호, 인간 소통의 열쇠] 예술과 기호 C.S.퍼스와 기호학

4. 예술과 기호

 

기호의 기능은 의미작용과 의사소통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본 기획시리즈에서는 기호의 두 기능에 대해 모두 설명하고 있지만 그중 특히 의사소통 또는 전달의 기능을 더 부각시키고 있을 뿐이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의사소통의 가장 주요한 수단이 되어온 것은 언어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면 말이나 글 외에도 소리, 이미지, 몸짓, 감촉, 냄새 같은 것들도 의사전달의 수단으로 빈번히 사용되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비언어적 의사소통에 능한 사람들을 우리는 자주 예술가들 가운데서 발견하곤 한다. 물론 남들보다 언어적 표현에 능숙한 시인이나 소설가도 예술가 집단에 속한다. 하지만 비유법이나 반어법에 자주 의존하는 시나 소설의 언어는 일상생활의 언어와는 매우 다르다. 정보의 정확한 전달이 가장 우선시되는 일상적 언어와는 달리 문학의 언어는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표현된 메시지 너머까지 바라보게 한다.

하나의 기호로서 예술작품은 퍼스의 도상, 지표, 상징의 삼분법에서 도상의 범주에 주로 속한다. 이는 문학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다.”라는 시구에 담긴 은유는 일종의 도상이다. 은유는 초상화나 사진처럼 그 대상과 외관상의 유사성을 갖고 있진 않지만, 특정 개념을 매개로 유사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도상의 특수한 형식이 된다. 말하자면 내 마음은 호수다.”에서 주어인 내 마음호수는 공통적으로 고요함과 닮았고 따라서 양자는 매개적 유사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시각예술가도 단순히 세계의 닮은꼴을 제작하는데 그치는 대신, 문학과 마찬가지로 은유 같은 비유법을 사용하여 심오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가 많다. 해석의 관습에 의존하는 상징인 동시에 도상이기도 한 은유는 모든 종류의 예술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기법으로, 심미적 예술의 의미작용을 도구적 언어의 그것과 차별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소다.

르네상스 미술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멜랑콜리아I>(1514)에서 컴퍼스를 쥐고 사색에 잠긴 여인을 중심으로 토성, 천칭, 마방진, 대패와 톱, 기하학적 도형들이 배치된 장면을 보여준다. 이 동판화에 등장하는 온갖 종류의 사물들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서양문화사의 배경 안에서 해석되어야 할 상징들이다. 제목인 멜랑콜리아 즉 우울은 그림에서 수심에 찬 여인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다혈질, 담즘질, 점액질, 우울질의 네 가지 체질 중 우울질은 기독교 세계에서 게으름의 표상이었으나, 르네상스시기에 이르러 천재의 기질과 동일시되었다. 뒤러는 <멜랑콜리아I>에서 자연의 진리를 드러내야 하는 자신의 임무 앞에서 고뇌하는 예술가의 자화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컴퍼스, 천칭, 대패와 톱, 기하학적 도형들은 합리성과 과학을 나타내는 환유들이다. 환유란 대상의 부분으로 전체를 의미하는 비유법으로 은유와 마찬가지로 상징이자 도상인 기호다. 서양미술사 전통에는 성서나 신화의 내용에 따른 관습적인 표현법이 존재해왔고 이를 해석하는 학문을 도상학이라고 불러왔다. 20세기 초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전통적인 도상학을 체계화하여 단지 개별적 도상의 의미를 풀이하는 차원을 넘어 작품의 근저에 깔린 시대정신까지 파악하는 도상해석학을 성립시켰다. 파노프스키는 "우울이 없이는 창조적 상상력도 기대할 수 없으며, 모든 창조는 우울로부터 연유한다."고 본 당대의 신플라톤주의자 피치노의 사상으로부터 뒤러가 영향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와 같은 도상해석학적 설명을 통해 신비에 싸인 <멜랑콜리아I>의 의미가 더욱 명확해졌다.

도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은 시각예술 외에 음악과 무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술상징론자 수잔 랭거는 예술작품이 우리의 감정과 동형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예술상징의 형식과 감정의 형식은 겉모습이 닮았다기보다는 구조적 유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유비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9번 교향곡 4악장이 기쁨을 표현한다고 해석되는 이유는 악음의 배열이 기쁨이라는 감정의 형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베토벤이 단지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찬가>에 곡을 붙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체적으로 느끼는 기쁨의 감정과 동일한 구조를 지닌 기호, 즉 기쁨의 도상을 구현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우리가 기쁨에 넘쳐 우와!”라는 감탄사를 터트리는 것도 도상기호다. 그러나 즉각적 외침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유적이 아니라 실제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현대 무용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비애에 찬 피나 바우쉬의 몸짓기호가 슬픔에 빠진 사람의 몸동작과 구별되는 것은, 그녀가 슬픔을 그 유기적 구조에 상응하는 형식을 지닌 상징 즉 은유로 승화시킨 덕분이다.

한편 동시대 미술가 중에는 지표기호를 통해 작품을 자기정체성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이들이 있다. 주지하듯 지표는 대상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닌 기호여서 대상의 존재를 증명해준다. 가령 곱게 화장을 한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초상사진은 작가의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리킨다. 데니스 오펜하임이 자신과 아들 지문 형태를 확대시켜 버팔로시 외곽에 그대로 전사한 대지예술, <정체성 확장>(1975) 또한 지표적 의미작용을 활용한 사례다. 하지만 미술작품은 지표적 요소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사물이나 감정의 재현으로서 도상인 경우가 많다. 또한 도상에 담긴 풍부한 의미는 긴 글로 풀어 쓰더라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흔히 예술가들을 창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언어적 소통에 능숙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의미를 길어낼 수 있는 비유적 표현들을 창안해냄으로써 많은 이들이 작품과 대화하도록 유혹하기에 창조적인 것이다


기호의 유동성과 의미의 천착 Art criticism

기호의 유동성과 의미의 천착

 

강 미 정 (서울대 융합기술원)

주세균의 <Dinner>(2015)는 서울에 사는 작가가 고향의 가족과 함께한 식사시간을 담은 것이다. 평범한 가정의 저녁식사는 마치 신성한 의식(ritual)인양 어머니의 기도로 시작된다. 이어 정성스레 저녁메뉴를 준비하는 어머니의 손길이 화면에 펼쳐지고 하얀 백자기에 담긴 음식들이 식탁에 놓인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작가 자신, 세 명의 가족이 마주 앉아 음식을 함께 나누는 장면은 평범한듯하면서도 평범하지 않다. 여느 한국 가정에서나 있을 법한 식사장면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영상에 삽입된 자막이다. “어머니가 정의감에 불을 붙이셨다,” “노력정직함은 정성으로 반죽된다,” 같은 자막은 작가의 영상제작 과정을 알지 못하는 관객에게 전혀 해설능력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오히려 암호에 가깝다.

<Dinner>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Text Jar> 시리즈를 제작한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세균은 ‘effort’‘challenge’처럼 특정한 가치를 담지한 단어의 컬리그래피를 회전시켜 환을 만들고 그 형태를 그대로 도자기로 제작했다. 이때 각 단어를 이루는 알파벳의 부분이 그릇의 전체 형태를 결정하게 된다. 작가는 <Dinner>에서 각 단어의 뜻만큼이나 다른 형태를 지닌 백자기들을 가족식탁에 올린 것이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아들에게 부모는 과거의 화신이다. 부모와의 저녁식사는 마치 타임머신처럼 작가를 과거와 상봉하게 하고 오래전 식탁에서 배웠던 교훈들을 떠올리게 한다.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도전적이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 <Dinner>에는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과 현재의 기억, 보편적 규범과 개별적 현실, 그리고 공적인 기호와 사적인 의미가 교차하며 뒤섞여 있다.

주세균을 세상에 알린 작업은 <국기>(2010-2012) 시리즈다색모래흑연가루베이비파우더 같은 가변적인 재료로 만든 만국기 작업은 몇몇 비평가들이 티벳 라마승의 만다라 제작에 비유할 정도로 구도자적 집요함과 끈기를 요하는 것이었다. <Notional Flag>(2011)는 여러 지점에서 아이러니컬해 보인다각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의 견고한 의미를 쉽게 흐트러질 가루들로 표현했다는 점몇 가지 색상과 도형으로 표상된 국가(nation)가 짐짓 실체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나 실상 개념(notion)에 불과하다는 점오랜 시간을 들여 구도적 자세로 구현한 이미지들이 한순간에 가루더미로 환원된다는 점 등이다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례규준상징은 얼마나 보편성을 띠는 것일까그것들은 얼마나 확고한 것일까주세균은 이렇게 술회한다. “현실에서 목격되는 많은 사건들은 기존에 내가 배우고 익힌 다양한 기준의 근거들을 혼란스럽게 한다모든 것들이 의심스러운 이 사회에서 의미들은 움직이고 정의들(definitions)’은 기준이 없어 보인다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 대한 지성과 현실의 현상이 접점으로 교차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는 기성의 기준’ 또는 규범을 뒤틀어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작업을 통해 그 자신만의 의미체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Tracing Drawing 68>(2012)은 전통 도자를 소재로 한 비틀기 작업이다. 그는 인터넷에서 채취한 보물이나 국보급 도자기의 이미지들을 하얀 자기 위에 연필로 베껴 넣었다. 그의 드로잉이 고도의 정밀묘사였음에도 자기의 형태와 표면 이미지 사이엔 괴리가 생긴다. 애초에 <Tracing Drawing 68>의 제작을 위해 작가가 여러 출처에서 도자기 사진을 수집하여 조합했기 때문에 베껴진 이미지는 원작의 외관과 다소 거리가 있다. 또한 둥근 항아리에 평편한 이미지를 투사한 결과, <Tracing Drawing 68>은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으로 지각된다. <Tracing Drawing 68>은 소재가 매우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국기>와 매우 유사한 아이러니를 빚어내고 거의 동일한 질문을 제기한다. <국기>에서 의문시했던 것이 현행의 제도였다면, 이번엔 과거의 전통이다. 작가는 더 견고한 가치를 찾아 다변적인 현대미술을 등지고 전통 도예로 향했었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건 전통적 가치는 과연 보편적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현행 제도나 과거 전통 모두 개인이 좌우할 수 없는 사회적 규약이기에 그 의미가 명확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통용되는 기호가 개인적 현실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은 일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모호할 수밖에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이들이 경험하는 공적 규범과 사적 현실의 괴리에 작가는 더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사회적 의미 규준이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의미와 의미체계 자체에 대한 천착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의미,’ ‘기준,’ ‘정의의 사전적 정의를 베이비파우더와 모래를 이용하여 전사한 2010년의 <Black Sign> 시리즈는 기호와 의미작용에 대한 그의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잘 드러낸 초기작이다.

주세균 작업의 문제의식은 전통과 규준, 기호와 재현, 인식과 오인(misrecognition)으로 압축할 수 있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말대로 하나의 기호를 구성하는 두 요소 즉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자의적이라면(arbitrary), 국기로 대표되는 국가라는 제도나 국보 제68번이라는 규정은 우리가 가진 통념만큼 그렇게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소쉬르는 자신의 기호학적 언어학 연구를 사회심리학의 한 부분으로 규정했다. 이 심리학적 학문에선 특정한 개념(기의)이 특정한 소리(기표)에 의해 지시되는 원리가 사회적 관습에서 유래했다고 간주된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국기나 국보라는 기호가 지닌 권위는 영원할 수 없고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호나 재현이 불변의 가치를 담지하고 있진 않다는 판단은 개인적 사고과정에서 발생한다. 찰스 S. 퍼스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개별적 해석활동을 고려한 기호이론을 제시하였다. 하나의 기호가 어떤 대상을 지시한다는 사실은 누군가의 해석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다. 관습적 해석방식이 주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기호에 대해 각 사람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똑같을 수 없다. 더욱이 사회적 제도나 관례가 본래 유동적인 것이라면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받아들인 의미를 마냥 틀렸다고만 할 수도 없다. 다만 사회 내 존재로서 개인이 어느 시점에 어떤 근거에서 유동하는 기호의 의미를 일시적으로나마 정박시키느냐의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사회적 의미작용의 불확정성은 개인적 인식의 불완전성을 초래한다. 자크 라캉이 잘 지적했듯이 우리의 인식 또는 이해는 기본적으로 오인 내지는 오해에 기초한다. 주세균이 자주 활용하는 착시 유도 장치는 이러한 인식의 불완전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는 <Notional Flag>에서 시작된 착시 유도 트릭을 후속 작업에서 거듭 사용하고 있다. 국기처럼 보이나 실제 국기를 왜곡시킨 <Notional Flag>처럼 <Tracing Drawing 68>는 국보 제68호와 꼭 닮은 듯하지만 실제로는 변형되어 있다. <무궁화 패턴>시리즈는 마치 전통 도자기 문양을 그대로 재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초문과 무궁화를 혼합하여 작가가 창안한 것이다. 2013년 개인전에서 전시한 <Moon Jar> 시리즈 역시 눈속임에 기초하고 있다. 마치 백자처럼 보이는 달항아리는 실제로 흑자의 표면을 흰 분필과 크레용으로 칠한 것이다. 거울을 이용하여 그릇의 부분으로 전체 형상을 표현한 <Untitled (Mirror, Inlaid pottery)>(2014) 시리즈 역시 인간의 불완전한 인식 기제를 암시한다.

주세균은 근작 <Dinner>에서 종전과 달리 공적인 기호체계보다 사적인 의미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의 관심은 처음부터 사회적 규준 못지않게 개인적 현실에 닿아 있었다. <국기> 시리즈의 재료인 베이비파우더, 모래, 분필은 모두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과 밀착되어 있다. 그가 일찍이 도예에 발을 들인 데는 전통에 대한 관심 외에 다도를 하시는 어머니의 영향도 한몫 했다. 작가 개인의 기억이 재현된 텍스트 그릇들이 진열된 <Cupboard>(2015)2007년 자신만의 그릇들을 수집하기 위해 제작한 <My Cupboard>의 반복처럼 보인다.

주세균은 접점 찾기,” “조율 또는 합의과정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공식화된 문화가 강요하는 의미를 개인화하는 방식을 모색해 왔다. 그 방식은 과거의 전통과 현재의 기억, 보편적 규범과 개별적 현실, 또는 공적인 기호와 사적인 의미를 함께 엮어 새로운 의미체계를 제시하는 쪽을 향하고 있다. <Dinner> 등 영상작업을 포함한 <Text Jar> 시리즈는 종전의 <국기> 시리즈나 <Tracing Drawing> 시리즈에서 했던 기성 의미체계의 모방 및 변형작업과는 달리, 그야말로 새로운 의미체계의 생산작업이기 때문에 주세균의 예술 노정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될 것 같다. 공적 영역의 소통체계에 의문을 던지는 동시에 공식 문화를 개인적 의미세계 안에서 소화하기, 더 나아가 자신만의 의미체계 만들기는 작가가 이제껏 천착해온 화두였다. 이처럼 묵직한 화두를 국기, 패턴디자인, 도예, 컬리그래피의 넓은 스펙트럼의 주제들을 통해 실험해온 주세균이 <Text Jar> 시리즈 이후 어떤 행보를 이어갈지 궁금하다. 파우더 설치나 전통 도자문양의 정밀한 모방, 텍스트를 형상화한 그릇빚기 등에서 보여준 수공의 노고와 학부 시절부터 씨름해온 유동하는 기호에 대한 사유에서 작가의 성실성이 진하게 전해지기에 앞으로 보여줄 그의 작업이 자못 기대가 된다.


[기호, 인간 소통의 열쇠] 이미지와 텍스트의 기호학적 차이 C.S.퍼스와 기호학

3. 이미지와 텍스트의 기호학적 차이

 

20세기는 학문 전 영역에 있어서 기호학적 전환의 시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호학적 전환은 리처드 로티가 언어적 전환이라고 말한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언어는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나타냄으로써 의미를 생성하고 전달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간적 소통수단이다. 20세기 들어 철학은 과거처럼 세계의 본성에 대해 논하는 대신 세계에 대해 기술한 언어의 분석으로 선회했고, 언어학은 언어를 다른 더 중요한 일을 위한 보조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탐구할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은 실제 언어뿐만 아니라 그림, 사진, TV영상 같은 이미지조차도 일종의 언어로 간주하는 태도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사람들은 영상기호외에 영상언어라는 일견 모순적인 용어를 구사하기도 한다.

영화의 한 장면을 일종의 텍스트로 간주한다는 것은 이미지가 단지 보기의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장처럼 읽기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현상적 차이가 기호학적으로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주로 언어기호의 특성과 구조에 대해 주목했던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달리 찰스 S. 퍼스는 언어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기호에 관심을 기울였다. 퍼스에 따르면 말과 글뿐만 아니라 이미지, 소리, 냄새 등 온갖 종류의 지각 현상이 기호로 작용할 수 있다. 퍼스는 기호전달체와 지시대상의 관계를 중심으로 세 종류의 기호를 분류했다. 즉 도상은 양자의 닮음에 근거하여 해석되고, 지표는 양자의 물리적 연관에 의해 해석되며, 상징은 관습적 코드에 따라 해석되는 기호다. 퍼스의 도상, 지표, 상징의 삼분법은 이미지 같은 비언어적 기호와 언어적 기호의 의미론적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림1] 르네 마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953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그림1]에는 도상과 상징 두 종류의 기호가 등장한다. 실제 파이프로 착각될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된 파이프의 그림은 도상이고, 파이프 그림 아래에 쓰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문장은 상징이다. 프랑스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파이프 이미지 아래의 글씨들은 아무 뜻도 전달하지 못한다. 오로지 프랑스어권에서 통용되는 문법을 학습한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문자언어와 달리, 파이프와 꼭 닮은 파이프 그림은 누구나 그것의 재현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마그리트는 왜 파이프 그림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았을까? 아마도 그는 이것은 파이프를 재현한 이미지이지 파이프 자체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마그리트는 회화의 임무는 자연의 정확한 재현이라고 믿는 서구인의 관습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적절히 활용하여 현실 세계의 닮은꼴을 제작하는 재현의 관습은 회화를 단지 도상일 뿐 아니라 상징이기도 한 기호로 만든다. 회화가 일종의 상징으로 간주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비언어적인 기호이다. 회화에는 언어처럼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나, 또 단어를 구성하는 음소 같은 분절적 단위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모든 언어는 디지털적인 반면, 이미지는 때로 상징으로 작용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아날로그적이라는 것이다.

[그림2] 판자니 파스타 광고

 

롤랑 바르트는 일찍이 소쉬르의 구조주의 기호학을 영상언어의 해석으로 확장시킨 인물이다. 이미지의 수사(1964)에서 바르트는 잡지에 게재된 파스타 광고를 분석한다. 광고에는 판자니라는 상표를 비롯한 언어적 기호도 눈에 띄고, 장바구니와 각종 파스타 재료의 이미지 즉 비언어적 기호도 보인다. 판자니 광고를 분석하면서 바르트는 우선 언어기호의 의미의 두 층위를 분리한다. 가령 ‘PANZANI’라는 단어는 단지 파스타 제조회사를 외시할 뿐 아니라, ‘이탈리아풍이라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광고의 사진이미지에서도 언어와는 다르지만 문화적 코드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토마토와 고추 같은 야채들이 담긴 장바구니는 재료의 신선함과 손수 준비한 식탁의 행복감을 암시하고, 화면에 편재한 빨강, 초록, 노랑의 색채는 이탈리아란 나라를 떠올리게 한다. 하나의 정물화처럼 보이는 사진의 구도 또한 서구 미술의 전통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그런데 사진은 카메라의 기계적 메커니즘에 따라 자동적으로 생성된 것이어서, 사람이 제작한 드로잉이나 회화와 달리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순수한 이미지로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퍼스는 사진을 지표기호의 한 사례로 간주했다. 사진은 그 대상과의 광학적 연관성을 갖고 있는 지표인 한편, 대상과 외양이 매우 유사한 도상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이런 사진의 지표적 의미를 코드 없는 메시지라고 부르면서 그 역설에 대해 언급한다. 즉 사진이 지시대상 외엔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 것 같은 텅 빈인상은 사진의 함축적 의미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장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판자니 광고사진은 지표인 동시에 상징인 셈이다.

비언어적 기호인 이미지는 주로 상징적 의미작용에 의존하는 언어적 기호인 텍스트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의미를 생성한다. 시어 같은 문학적 텍스트를 예외로 한다면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지가 기호학적으로 더 유용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음소나 단어 같은 기본 단위로 분절되는 언어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소통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선적으로 나열되는 텍스트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 반면, 장황한 이야기를 단일한 화면 안에 배열하는 이미지의 의미는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이미지와 텍스트는 상이한 의미작용 방식을 취하며 각자의 장단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사회적 소통에서 이미지와 텍스트를 적절히 혼용하는 것이다.


[기호, 인간 소통의 열쇠] 현대기호학의 성립 C.S.퍼스와 기호학

2. 현대기호학의 성립 - 소쉬르와 퍼스를 중심으로

 

우리는 ()이 씨가 된다.”는 얘기를 종종 한다. 말이 그저 말 뿐인 것이 아니라 그 말의 내용이 실현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자주 쓰는 이 문구는 전통적인 언어관을 잘 대변한다. 말이란 건 한낱 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본질적 실체와 불가분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 언어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이었다. 즉 말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필연적인 연관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소나무를 '소나무'라고 부르고 까치를 '까치'라고 부르는 건 이런 단어들이 실제 소나무나 까치의 본질을 지시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양자의 결합이 우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이런 생각은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는 이와 같은 상식을 뒤엎는 언어관을 제시하며 현대기호학을 정초한 인물이다. 서양 전통에서는 언어를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여겨온 반면, 소쉬르는 언어를 순전히 도구적으로 보던 시각을 벗어나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연구대상으로 간주했다. 그가 언어에 대한 종래의 관념을 전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언어를 하나의 기호로 간주했던 덕분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하나의 기호는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두 구성요소와 이것들을 결합시키는 규약에 의해 성립된다. 각 나라의 언어가 다르다 하더라도 모든 언어가 이러한 일반 원리에 따라 구성된다는 소쉬르의 입장을 흔히 구조주의(structuralism)’라고 한다. 의미작용의 구조 또는 체계가 기호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보는 관점은 기호가 사물의 본질을 지시함으로써 의미가 발생한다고 보는 본질주의와 대조적이다.

소쉬르가 말하는 기표란 기호가 취하는 형식의 측면을 가리키고, 기의란 기표에 의해 전달되는 의미내용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나무라는 두 음절의 소리는 기표고 그 소리가 우리 머리에 떠올리게 하는 개념 즉 나무의 사전적 정의는 기의라고 할 수 있다. 소쉬르의 언어학을 혁명적으로 만든 주요 지점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자의적이라고(arbitrary) 봤다는데 있다. 이전까지 말과 의미의 관계를 필연적이거나 유연적(motivational)이라고 간주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소쉬르는 양자의 결합이 우연에 가깝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말을 들을 때 특정한 의미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언어사용의 관습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 것을 미국인은 ‘tree’라고 하고 독일인은 ‘baum’이라 하며 프랑스인은 ‘arbre’라고 한다. 나라마다 상이한 언어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은 기표와 기의의 관계엔 아무런 내재적 필연성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림1] 생각의 층위와 소리의 층위


소쉬르는 언어기호의 의미가 구성요소들 간의 차이의 체계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서로 다른 기표들과 서로 다른 기의들은 각각 소리의 층위와 개념의 층위에 모호하게 뒤섞여 있다. 하나의 기호는 상이한 소리들의 연속체에 있는 특정한 음가와 상이한 생각들의 연속체에 있는 특정한 개념이 서로 결합됨으로써 생겨난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러한 결합의 규칙은 언어공동체마다 다른 관습이 제공한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것은 의미작용이 고유한 규칙들에 따라 체계 내에서 생산되는 가치라는 뜻이다. 이러한 규칙들을 제어하는 것은 사회적 계약이다. 그러므로 소쉬르의 말대로 언어기호는 어느 개인 속에서도 완전할 수 없고 집단 속에서만 완전하게 존재한다.”

기호의 일반적 구조나 체계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던 언어학자 소쉬르와 비교할 때, 미국 프래그머티즘 철학자 찰스 S. 퍼스(Charles S. Peirce, 1829-1914)는 기호의 실제 활용에 상대적으로 더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기호가 성립하려면 개별 주체에 의한 해석이 요구된다고 보았던 퍼스는 중세 스콜라철학에서 유래한 기호란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나타내는(stand for) 어떤 것이라는 정의에 해석의 요소를 부가하였다. 그는 기호를 이렇게 정의한다. 기호 또는 표상체(representamen)는 어떤 관점 또는 능력에서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나타내는 어떤 것이다.” 풀어 말하면, 하나의 기호는 기호의 형식적 측면인 표상체, 표상체가 지시하는 것으로서의 대상(object), 그리고 표상체가 어떤 대상을 지시하고 있는가를 해석한 결과인 해석체(interpretant)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림2] 무한한 세미오시스

퍼스가 해석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의미작용은 끊임없는 해석의 연속으로 상정되었다. 말하자면 표상체의 의미효과이자 정신적 관념인 해석체는 다시 새로운 표상체로 간주되어 새로운 해석체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림2]에서 보듯이 첫 번째 표상체 R1은 첫 번째 해석체 I1을 생성한다. 그런데 I1은 애초의 표상체의 확고한 의미가 아니다. 해석체 I1은 다시 해석해야 할 어떤 것 즉 표상체 R2가 되어 다시 I2를 낳는다. 이러한 해석과정은 일련의 표상체들 또는 해석체들이 공통적으로 지시하는 하나의 대상으로 수렴될 때까지, 다시 말해 애초의 표상체가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순신의 <난중일기>라는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에 처한 해석자마다 다를 것이다. <난중일기>가 첫 번째 표상체라면, 그것이 지시하는 임진왜란이 그 대상이며, <난중일기>에 대한 연구자의 해석이 해석체가 된다.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진실은 <난중일기>가 쓰인 이후 지금까지 축적되어 왔고 미래에 지속될 일련의 해석들을 통해 알려질 것이다.

퍼스는 이처럼 끊임없이 지속되는 기호 해석과정을 세미오시스(semiosis)’라고 명명했다. 그가 무한하고 연속적인 해석과정을 상정한 것은 각각의 해석이 현재 아무리 널리 동의를 얻고있다 하더라도 언젠가 다른 해석에 의해 반박될 수 있다고 보는 오류가능주의적(fallibilistic) 믿음 때문이었다. 모든 해석이 오직 잠정적으로만 옳다고 보는 퍼스의 입장은 모든 종류의 의미작용이 특정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 이뤄진다고 보는 후기구조주의의 시각과 잘 부합한다. 퍼스는 세미오시스 개념을 통해 의미작용의 안정적인 모델 대신 불안정적이고 개방적인 모델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소쉬르와 결정적으로 차별화된다. 1980-90년대 큰 인기를 구가했고 현재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이 퍼스 기호학에서 구조주의의 대안을 발견한 것은 세미오시스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의 비결정성에서였다. 가령 후기구조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의미는 차이의 체계에서 발생한다.”는 소쉬르의 구조주의적 신념을 수용하면서도, 의미작용의 체계 내적 안정성에 대한 소쉬르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기호의 의미 결정은 끝없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고 본 데리다는 소쉬르의 차이(difference)’차연(différance)’으로 대체하였고, 그럼으로써 그의 후기구조주의 사상의 출발점이었던 소쉬르의 기호론(semiology)보다 오히려 퍼스의 기호학(semiotics)에 근접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현대기호학의 초석을 다진 두 인물인 소쉬르와 퍼스에 대해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탁월하다거나 더 혁명적이었다고 단언할 순 없다. 양자는 각각 자신의 학문분야에서 충분히 탁월했고 혁명적이었다. 소쉬르는 종래의 역사비교언어학의 틀을 벗어나 공시언어학 영역에서 기호에 관한 일반론을 발전시킴으로써 언어연구의 현대적 전환을 초래했고, 퍼스는 무한하고 연속적인 과정으로서 세미오시스 개념을 근대적인 주객의 이분법을 극복할 대안으로 제시함으로써 동시대 철학의 선구적 모델이 되었다. 오늘날 기호학이 언어학, 철학, 커뮤니케이션학, 문화연구를 통섭하며 광범위한 학제적 연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기호론과 퍼스의 프래그머티즘적 기호학이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준 덕분이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