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이야기1]: 비디오아트의 과거, 현재, 미래 미술이야기

1984년의 첫 아침은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함께 밝았다. 이 작품은 뉴욕과 파리에서 동시에 진행된 공연프로그램을 베를린, LA, 서울 등의 대도시에서 위성 생중계하는 대규모 작업을 통해 이뤄졌다. 일찍이 조지 오웰은 정보매체를 장악한 권력기관에 의해 개인생활이 철저히 통제되는 미래사회를 전망하면서 <1984>를 썼다. 그러나 1984년의 현실은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았다. 백남준의 위성공연은 실시간으로 지구 곳곳을 연결시켜줌으로써 대중매체의 소통능력을 극대화했다. 종전의 TV가 정보를 일방적으로 송신하는 권위적 매체였다면, 위성방송시스템은 전지구적 상호소통을 성취한 민주적 매체다. 그것은 생방송을 통한 시청자와의 수직적 소통을 위성 중계를 통한 전지구적 차원의 수평적 소통으로 확장하여 사방소통을 이룸으로써 그야말로 '지구촌'을 실현시킨다. 이것은 애초에 백남준이 '참여TV'로 시작했던 비디오작업을 우주적 차원에서 실천한 것이기도 하다.


비디오아트는 무엇보다도 '대안TV'로 등장했다. 초기의 비디오작업들은 TV의 비민주적·비대칭적 소통방식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1963년에 처음 선보인 백남준의 '참여TV'는 TV 내부회로나 브라운관을 조작하여 추상적인 선묘를 창출한 작품이다. 그의 손에서 TV는 일방적으로 정보를 송출하는 매체가 아닌, 관객의 참여를 통해 이미지가 조작되는 소통적 매체가 되었다.

1965년에 소니사에서 휴대용 비디오카메라가 시판되자 '대안TV'로서 비디오아트는 본 궤도에 오르게 된다. 스튜디오와 대형장비를 갖추지 않고도 손쉽게 영상물을 제작할 수 있게 되자 실험적인 예술가들은 대안적 이미지 창조매체로서 비디오에 주목하였다. 전통적 오브제 미술을 거부하고 신체를 표현매체로 삼던 행위예술가들 중 몇몇은 비디오를 퍼포먼스의 개념적 틀로 사용하는 비디오 퍼포먼스를 출범시켰다.

비토 아콘치의 비디오테이프 <Second Hand>(1971)는 그러한 예들 중 하나다. 화면에는 관객을 향해 등을 돌린 벽에 걸린 커다란 벽시계를 바라보는 아콘치가 등장한다. 화랑 바닥에 누워있는 또 다른 예술가가 등장하기 전까지 관객들은, 조명주위를 돌며 벽시계를 응시하는 아콘치를 지루하게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 비디오 매체의 상호성은 비디오 매커니즘 자체가 생태학적 차원의 소통능력을 함축하고 있다는 데 있다. 비디오 퍼포먼스를 감상하는 관객들은 마치 예술가의 행위를 실제로 체험하는 듯한 심리적·실존적 경험을 갖게 된다. 제3의 장면을 관망하는 영화 관객과는 달리, 비디오 시청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화면의 영상과 쉽게 연관시키고 그럼으로써 보다 능동적인 입장에 서게 된다.



오늘날 많은 예술가들은 카메라를 붓삼아 갖가지 이야기를 화면에 담아낸다. 지난 봄 시내의 한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던 빌 비올라는 비디오매체를 통해 형식미학을 추구하는 작가중 하나다. 화염속으로, 그리고 물기둥속으로 점차 사라지는 사람의 이미지를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는 그의 <The Crossing>(1996)은 정제된 영상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백남준과 비디오 퍼포먼스작가들이 행위예술에서 그들의 작업을 시작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비디오아트는 행위예술과 마찬가지로 관객과의 상호소통을 주요한 목적으로 삼는다. 수용자의 역할이 더욱 무게를 더해가는 것이 오늘날 포스트모던한 현실이기에, 소통과 참여의 매체로서 비디오아트의 비중은 날로 커져가고 있다. 최근 젊은 미술가들은 비디오뿐만 아니라 컴퓨터그래픽 툴과 인터넷기술을 적극 매체로 사용한다. 덕분에 관객에게 보여지는 이미지의 영역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장되었다. 더욱이 인터넷상에서 이뤄지는 '웹아트'의 경우 접근성과 소통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대되었다. 현재 '미디어아트'가 미술계 안팎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아마도 미디어아트가 지닌 탁월한 소통능력 덕분일 것이다.

[* 2003년 10월 6일 ; 경희대 대학신문에 연재한 <현대미술이야기> 시리즈]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