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이야기4]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여성의 예술 미술이야기

제5회 월경 페스티벌 "百女百色"은 부대행사로 "생리대에 말걸기"를 선보였다. 남녀노소 시민들은 생리대에 글귀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또 염색을 하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행사에 참여한 남자들 중에는 생리대를 처음 보는 사람도 꽤 있었고, 월경이 무엇인지 처음 알게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무지는 아마도 월경은 여자들의 '은밀한' 일이며 내가 알 바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러나 여성의 몸과 性은 규방의 비밀이 아니며, 수치스러운 것은 더욱 아니다. 남녀 모두가 건강한 삶을 누리려면 이러한 무지와 편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서울시내 각 대학의 여학생회는 바로 이런 취지에서 해마다 월경 페스티벌을 기획해 왔다.



여성의 신체를 비천한 것으로 혹은 은밀한 것으로 은폐해 온 것은 가부장적 사회의 관습적 사고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신체는 남성들에 의해 신비화되어 왔다. 고대의 <밀로의 비너스>에서부터 현대의 상업 광고에 이르기까지 여성 신체의 에로틱한 이미지는 남성 주체의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는 관조의 대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한 여성 신체는 축 처진 배에 보기 싫은 체모를 지니고 생리를 하는 몸이기보다는, 남성들의 욕망에 부응하도록 각색되고 미화된 몸이다. 고릴라 가면을 쓰고 시위하는 것으로 유명한 페미니스트 미술 그룹 게릴라 걸즈의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벌거벗어야 하는가?>(1989)는 서구 미술의 남성중심적 시각을 잘 풍자하고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단 5%의 여성미술가의 작품을 걸고 있는 반면, 이 미술관이 소장한 누드 중 85%가 여성을 소재로 한 것이라면, 여자들은 '벌거벗어야'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추론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비하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은 진정한 여성상의 창조를 위해 여러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은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긍정적인 담론들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주디 시카고의 <디너 파티>(1974-79)는 그러한 시도의 초기 사례다. 시카고는 디너 파티에 초대된 총 39명의 여류 명사들을 위해 39개의 여성 성기를 형상화한 도자기 접시를 제작했다. 버지니아 울프, 조지아 오키프 등 서양문화사의 위대한 여성들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성기 이미지들은, 여성의 성이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임을 선언한다. 여성의 성은 더 이상 수동적인 관조의 대상도 아니고, 억압과 은폐의 대상도 아니다.

다라 번범의 비디오 <기술/변형: 원더 우먼>(1978)은 TV의 여성 재현코드를 몽타주 편집 기법으로 해체한 작품이다. 작품에선 린다 카터가 여비서에서 원더 우먼으로 변신하는 장면, 원더 우먼이 팔찌로 총알을 막는 장면 등이 "wonder woman~"하는 주제음악을 배경으로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드라마의 극적 장면이 파편화되어 반복될 때 그것은 클라이맥스의 긴박감 대신 우스꽝스러움과 진부함으로 다가온다. 원더 우먼은 수퍼맨과 마찬가지로 남성적 욕망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남성들의 강력한 성적 능력에 대한 열망이 수퍼맨을 낳았다면, 또한 그들의 강력한 성적 욕망이 8등신의 글래머인 원더 우먼을 창조했다.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식으로 대중매체의 상투적인 여성 재현방식을 폭로한다.



1970년대 저항 문화의 일환으로 등장한 페미니즘은 이제 문화적 소수라고 하기엔 상당히 넓은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부장적 질서가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 오늘날, 페미니즘 미술가들은 다각적인 방식으로 과거의 남성을 위한 남성에 의한 남성의 미술을 보충할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여성의 미술을 발굴하고 있다.

[* 2003년 11월 3일 ; 경희대 대학신문에 연재한 <현대미술이야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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