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잡론(美學雜論) 간추린 미학사

들어가면서...

헷갈림의 미학, 썰렁함의 미학, '비움'의 미학, 과잉의 미학, 차이와 간극의 미학, 이중성의 전략과 경계의 미학, 하강의 미학, '다케시 폭력'의 미학, 남도의 미학, 속담의 미학, 빵의 미학, 죽음의 미학, 실패의 미학, 원효설화의 미학, 결혼의 미학, 몸매미학, 노출미학, 신사복의 미학... "이현령 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란 말이 문득 생각난다. 어느 틈인지 모르게 "미학"이란 말은 어떤 이야기 끝에 슬쩍 끼워 넣기에 적당한, 아니 매우 적절히 미사여구의 역할을 해내는 단어가 되어버린 듯 하다. 신문의 경제란에서 이런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잦은 떨림과 반전의 미학... 어느덧 선물시장 참여자들에게 30분만에 겪게 되는 반전의 혼돈 스러움은 이제 클라이맥스를 앞둔 긴장감으로 단련됐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혼돈을 넘어 미학으로 전이됐다는 말이다..."


아름다움이란 말을 포함하고 있어서인지 "미학(美學)"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것 같다. 이 말의 남용 내지는 잦은 오용이 그 증거가 아닐까? 대개의 경우 "미학"은 "미" 혹은 "미덕"이 쓰여야할 자리에 쓰인다. 다시 말해 하강의 미, '다케시 폭력'의 미, 남도의 미, 속담의 미, 결혼의 미, 실패의 미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우리는 미학이란 말을 주로 비평문을 통해 자주 접하게 되는데, 이 경우 이 말은 보통 평론의 대상이 되는 작품의 양식상의 특성을 가리키곤 한다. 즉, "썰렁함"을 특징으로 하는 "도널드 닭"이라는 만화, "비움"으로 특징짓는 젠스타일의 인테리어, "과잉"을 특징으로 하는 하드고어 애니메이션, "차이와 간극"이란 표현으로 적절히 기술되는 모 미술가의 작품들... 이 역시 "미학"의 적절한 용례라고 볼 수 없다.


미학의 탐구영역 하나 - 미


미학은 하나의 학문이다. "미학"을 "미"의 대용어로, 혹은 특정 작가의 개성적 양식이나 작품 제작기법, 예술관 등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는 것은 미학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미학은 아름다움을 그 주요한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은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속성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사물인가? 만약 어떤 사물이 아름답다면, 그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객관적인 속성인가, 아니면 그것덕분에 우리가 갖게 되는 즐거움인가? 우리는 8등신의 미녀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녀는 5등신이나 6등신 밖에 되지 않는 우리들에 비해 늘씬한 몸매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미는 대상에 속한 성질인 것처럼 보인다. 가령 8등신이라든지, 롱다리라든지.... 그런가 하면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라고 말하면서 미를 일종의 쾌감(pleasure)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특유의 낮게 깔리는 저음으로 "I'm a fool to want you..."를 부르는 빌리 할리데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노래가 전하는 멜랑꼴리한 정서의 "아름다움"을 말할 것이다. 이때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축축 늘어지는 보컬을 들을 때 내가 느끼는 쾌감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아름다움을 쾌감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내가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다면, 아름다움은 사람마다 다 다르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사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내 친구가 좋아하는 노래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뭐... 잘생긴 남자에 대해 얘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기에 잘생긴 남자와 내 친구가 말하는 잘 생긴 남자가 다를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무언가가 아름답다 혹은 그렇지 않다는 판단은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8등신에 롱다리, 그리고 줄리앙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야만 아름다운가? 과연 아름다움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기준이 있는가? 이런 온갖 질문들을 던지고 그에 대해 답해 보려고 하는 것이 미학이다. 다음 그림을 한번 보자.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년경]

 
이 그림은 아름다운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할 것 같다. 아름다움의 화신, 비너스가 여성미의 이상을 구현하고 있어서건, 화면의 전체적인 균형 잡힌 구도 때문이건, 보티첼리의 섬세하고 우아한 필법 때문이건 간에 많은 사람들은 이 그림이 "아름답다"는 데에 동의할 것 같다. 우리는 예술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름다움"을 거론하는 일이 많다. 생각해보면 아름다운 대상에는 예술작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 미녀, 미남의 판단기준에 대해서 거론한 바도 있지만, 우리는 자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통상 예술과 미를 밀접히 관련시키고 예술은 미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활동으로 간주하면서 예술작품을 통해 미를 느끼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미학의 탐구영역 둘 - 예술


미 이외에 미학에서 주요한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또 다른 영역은 예술이다. 예술 현상과 관련해서도 우리는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인간의 제작물 중 어떤 특수한 것들에 대해서만 예술작품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부여한다. 그렇다면 예술작품과 예술작품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예술감상을 가치있는 경험으로 간주하는가? 예술가의 창조력은 어떤 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예술가는 우리보다 뛰어난 지성을 소유한 것인가 아니면 보다 뛰어난 감성을 소유한 것인가?


보티첼리의 그림을 다시 보자. 그가 비너스의 탄생신화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모르긴 해도 꽤 많은 지식을 필요로 했을 것 같다. 우선 그리스 로마신화를 비롯한 고대 문헌에 대한 지식, 아름다운 인체 비례에 대한 지식, 채색법과 드로잉에 대한 지식... 요즘 미대생들이 4년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 것처럼 보티첼리도 이 걸작을 남기기 위해선 상당히 긴 수련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보티첼리 같은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대단히 학구적이고 지적이었다. 그들은 역사, 문학, 고고학 등에 대해 인문학자 못지 않은 지식을 섭렵했을 뿐 아니라, 정확한 인체 묘사를 위해 해부학과 골상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또한 실제 현실 공간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원근법을 개발해냈는데, 이를 위해서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수학, 특히 기하학에 대한 전문가적 식견을 쌓아야만 했다. 이렇다 할 때 이 예술가들은 사실 학자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예술가는 과연 학자, 더욱이 수학자처럼 대단히 논리적이고 지적인 사람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가? 이와 반대로 우리가 갖고 있는 예술가 이미지는 "끼"가 넘쳐서 주체할 줄 모르는 사람에 가깝지 않을까? 소위 "끼"라는 건 지적인 능력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열정, 영감, 감정 등과 관계있는 비이성적인 능력처럼 보인다. 우리는 반 고흐의 "열정과 광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치 비정상적으로 정서적인 반 고흐의 성격이 그의 예술의 원천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반 고흐는 홧김에 자기 귀를 베어 창녀에게 선사하기도 했고, 정신질환으로 인해 간헐적인 발작에 시달렸으며, 결국은 자신의 복부에 총알을 박고 스스로 인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비극적인 인생과 그러한 인생을 초래한 그의 기질에서 우리는 그의 예술적 창조력을 발견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곤 한다. <해바라기>나 <별이 빛나는 밤>의 꿈틀거리는 듯한 붓자욱은 그의 제어할 수 없는 격정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듯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풍부한 감성과 상상력을 가진, 대단히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예술가라는 족속들이며, 훌륭한 예술가란 그러한 자신의 개성을 잘 표현해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보티첼리와 기타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진정한 예술가가 아닌가?


미와 예술의 관계
 

예술비평의 문제와 맞물리면서 예술에 관한 논의들은 미에 대한 논의보다 한층 더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의 역사를 통하여 미는 예술이라는 특수한 활동이 추구하는 가치로 정립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뒤러의 시대, 즉 르네상스 시대이후 16~17세기를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는 바꿔 말하면, 르네상스 시기이전에는 "예술이 미를 추구한다"는 사고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이렇게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밀로의 비너스는 아름답지 않은가?" "석굴암의 불상도 예술작품 아닌가?" 그렇다. 우리는 <밀로의 비너스>를, 석굴암의 불상과 <석가탑>, <다보탑>을,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예술작품이라고 부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르네상스 이전에는 "미"를 구현하기 위해서 혹은 그 자체로 향유되기 위해서 예술작품이 만들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비너스도, 불상도, 그리고 시스틴 예배당의 천정화도 "숭배와 섬김"이라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예술은 종교를 위한,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사회를 위한 도구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예술의 자율성이란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생겼다. 서구의 중세시대의 예술작품들은 거의 전적으로 신과 교회를 위해 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의 어떤 예술작품은 아름답지만, 어떤 예술작품은 공포스럽고 흉칙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17세기 이전엔 "예술"(fine-arts)이라는 말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음악, 미술, 연극, 시 등을 "예술"이라는 말로 묶고, 이들의 공통의 목표를 "미"로 규정하게 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자, 한번 생각해보자. 오늘날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예술이 과연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가? 바흐와 모차르트에 익숙한 청중들은 쇤베르그의 무조 음악을 아름답게 느끼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조작된 피아노 (prepared piano)로 연주된 존 케이지의 음악은 어쩌면 난해함의 대상이요, 더 나아가 불쾌함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미술관을 가 보자. 현대의 미술은 마치 "아름답고자"하는 목적을 상실하거나 망각한 것처럼 보인다. 피카소의 대형 누드화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미의 표상으로서 여인의 누드를 기대하던 사람들을 완전히 배신했다고 할 수 있다. 마르셀 뒤샹이라는 한 프랑스인은 한 술 더 떠서 소변기를 자신의 "예술작품"으로 전시회에 내 놓았다. 한창 인기를 끌었던 <엽기적인 그녀>를 보라. 그녀의 엽기적 행각은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지만, 우리를 열광시키기엔 충분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예술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것의 가치가 "미"라고 선언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꼴이 된다. 역사 속에서 "예술"과 "미"의 상관관계를 살펴볼 때, 그들의 밀접한 결합은 근대라는 특정 시기동안의 한시적인 현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부인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으리라. 아름다움 이외에도 미적(aesthetic) 가치 혹은 미적 속성은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어 숭고(sublime), 우미(grace), 영웅적임, 매혹적임, 드라마틱함, 비극적임, 희극적임, 개성적임 등이 있으며 심지어 퇴폐적임, 통속적임, 비속함, 추함마저도 미적 속성에 포함된다. 물론 아름다움이 미적인 것의 여러 형태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작용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단, 현대로 가까이 올수록 미적 가치의 범주는 점점 더 넓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미학, 하나의 철학


그러고 보면 미학이 다루는 문제영역은 그 어떤 학문보다도 넓은 것 같다. 우선 예술이 미학의 문제가 된다고 할 때, 여기에는 얼마나 다양한 인간의 활동이 포함되는가? 음악, 미술, 무용, 영화, 연극, 시, 소설, 사진, 비디오아트, 디지털아트...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들에서 창조되고 구현되는 미적 가치, 그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미가 미학의 하나의 커다란 주제영역을 이룬다. 미학은 "예술"과 "미"라는 두 개의 문제영역으로부터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은 각종 질문들에 대해 숙고하고 쟁론하는 작업이다. 그렇다 할 때, 미학은 상당히 철학적인 학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철학이다.


철학의 성격을 가장 잘 규정해 주는 용어는 "비판적"(critical)이란 말이다. 이것은 누구를 비난한다든지 남의 결점을 꼬집어낸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비판적"이라는 것은 "어떤 현상이나 사실을 무조건적으로 혹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의 장점과 단점을 잘 따져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 가장 잘 던지는 말은 "왜?" 혹은 "어떻게?"하는 질문이다. 철학에서 "왜?"라는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은 대체로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신념들이다. 과학적인 증명의 과정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사실들은 보다 즉각적으로 그 해답이 얻어질 수 있다. 일정한 실험 혹은 여타 증명 과정을 통해 입증될 수 있는 사실은 여러 번 "왜?"라고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신은 존재한다" 혹은 "사람은 양심적이어야 한다" 혹은 "예술감상은 가치 있는 경험이다"와 같이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전제하고 살아가는 신념들과 가치체계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철학은 이런 당연한 것들에 대해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에 대한 논리적인 답변을 추구한다. 그 신념이 옳다 그르다를 따져 보자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신념을 받아들일 때 무비판적으로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 자체로 옳다는 사실을 정당한 증거와 추론에 의해 증명해 보고자 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예술에 대해서도 우리는 여러 가지 신념들을 갖고 있다. 미학은 이러한 신념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러므로 앞서 보았듯이 "예술은 아름답다"와 같은 통념에 대해 무조건 동의하는 대신, "과연 그러한가?"하는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철학적 태도요, 곧 미학적 태도이다.
 

나오면서...
 

한마디로 말해 미학은 "예술과 미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미학은 "예술" 혹은 "미"라는 특수한 주제를 가졌을 뿐, 철학이라는 학문적 범주 안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제 "미학"이 성형외과 선전문구로 사용되거나 신문만화의 양식적 특성을 기술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 그다지 적절한 용례가 아님이 좀 더 분명해졌을 것 같다.

최근 들어 예술과 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부쩍 늘어나고 있고 더불어 미학에 대한 관심 또한 점증하고 있는 것 같다. 매스컴에서 자주 듣는 말처럼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기 때문일까? 어찌되었든 간에 예술 혹은 문화가 우리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커진 게 사실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영화를 보고, 뮤지컬을 보는 것은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활동이 되었다. 안정된 소비계층을 확보하면서 영화를 비롯한 문화산업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식되어 대규모 자본을 유입시키고 있다. 최근 국내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각종 영화제와 미술제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또 생각해 보면 요즘처럼 예술가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때가 있었던가 싶다. 대중예술을 하건 고급예술을 하건 성공한 예술가들은 사회적으로 상당히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게 현재의 실정이다. 이처럼 예술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향상되고 예술이 사회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기에, 오늘날 예술이란 활동과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반성작업은 더욱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미학적 태도로 더욱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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