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적 공간과 원근법 미술이야기

일찍이 레싱은 <라오콘>(1766)에서 시, 문학, 음악, 연극은 시간예술로, 회화, 조각, 건축은 공간예술로 분류한 바 있다. 통상 이들 공간예술은 "미술"이라는 용어로 통칭되는데, 이러한 어법은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이들 세 예술이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자각이 대두됨으로써 성립되었다. 바꿔 말해 르네상스 이전의 사람들은 이들을 그다지 비슷한 종류의 활동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사고이긴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건축은 회화나 조각과는 다른 종류의 활동으로 인식되었다. 우선 건축은 인간 생활에 필수적인 유용한 도구를 제공하고 기술공학적 발전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회화나 조각과는 다른 부류의, 정확히 말하자면 보다 우월한 부류의 활동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비해 회화와 조각은 비슷한 속성을 공유한다고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서구의 전통에서 이들 두 예술의 기능은 공히 외부 세계를 재현하는 데 있고, 그 결과 회화와 조각은 외적 대상의 닮음꼴을 만들어 낸다고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화와 조각 두 예술을 비교해보면, 그들 각각의 재현적 기능이 수행되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차원의 입체로 구현되는 조각과는 달리 회화의 재현작업은 2차원의 평면 위에서 이뤄진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 3차원적 공간성에 기초해 있다고 할 때, 조각적 재현이 회화적 재현보다 실재(reality)에 더 가깝다고 할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많은 화가들이 회화적 평면 위에 3차원성을 부여하는 기법, 즉 원근법(perspective)에 몰두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다시 말해, 회화의 주요한 과제 중 하나는 세계를 정확하게 재현해내는 일이었던 바, 회화적 평면 위에 실재와 매우 유사한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회화의 2차원성을 극복해야만 했고,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개발된 것이 원근법이라는 회화적 공간의 재현 원리였다.

"perspective"라는 단어가 시사하듯이, 원근법은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 즉 우리의 시각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라틴어 "perspectiva"는 중세에 "광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말이 우리의 시각 경험에서 취하게 되는 형태들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재현하는 분과 학문을 가리키게 된 것은 15세기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이다. 이태리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원근법적 재현 원리의 모델을 기하학적 구성에서 발견하였다. 실상 무언가를 바라보는 경험은 생리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측면을 갖게 마련인데, 르네상스인들은 이러한 사항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고, 유클리드 기하학의 가정들에 근거하여 시선이 진행되는 방법에 대한 완벽한 모델을 산출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우리는 일상적 경험을 통해 멀리 있는 물체는 작게 보이고 가까이 있는 물체는 더 크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중세 말의 미술가들도 이러한 직관적 지식을 회화제작에 적용하여 자연주의 양식을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인들은 직관적으로 그럴듯한 환영(illusion)을 만들어내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재현이 얼마나 정확한가 하는 사실을 측정하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열망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방법을 바로 기하학에서 발견하였다.

레오네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에 대한 과학적 기초를 제공했던 이론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회화론>(1435)에서 소개되는 원근법이론을 따르면, 시각 이미지는 눈과 보여지는 대상을 잇는 직선들에 의해 산출된다. 이 직선들이 우리 눈에서 나와 보여지는 대상으로 뻗어나간다고 할 때, 그 선들은 원추형의 시각 피라밋을 형성한다. 알베르티에 의하면 회화는 이러한 시각 피라밋을 관통하는 한 지점에 마치 유리창과도 같은 일종의 투과막을 세워놓은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 투과막에 들어 온 장면을 그대로 옮겨 그림으로 그린다면, 그림의 모든 인물, 대상, 공간적 거리 등은 실제 세계에서 나타나는 것과 완벽하게 비례하게 된다. 그는 이런 식으로 원근법적 구성이 회화적 공간 재현의 정확성을 보증한다고 생각했다.

[마사치오, <성삼위일체> 1425-28]


알베르티와 동시대인들의 선원근법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공간 개념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의 시각 경험에 상응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선원근법의 결함을 깨닫고, 시각의 자연적 조건에 보다 부합하는 "색채원근법"을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레오나르도는 자연을 실제로 관찰할 경우, 대상이 멀어질수록 그 색채가 희미해지고 푸른 빛을 띠게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에 따르면 대기 중에는 공기의 층들이 존재하며 대상이 멀어질수록 그 층이 더 두꺼워진다. 그는 공기에 약간 푸른 기가 있다고 믿었고, 거리가 멀어지면 색채의 선명도가 떨어지고 푸른 빛이 더욱 강해진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를 따를 때, 회화적 공간에서의 거리의 표현은 선적인 구성으로만 생각되어서는 안되며, 거리에 따른 색채의 변화가 반영된 것이어야 한다.

원근법 이론은 회화적 공간 재현의 정확성을 보증하기 위해 15세기 르네상스 미술가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탐구되었고, 르네상스 이후 확립되는 고전주의 미술전통이 근거하고 있는 이론의 커다란 골격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현대에 이르게 되면 서구 회화는 고전주의 전통의 점진적인 붕괴 과정을 겪는다.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입체주의를 거쳐 현대로 진입하면서 화가들은 더 이상 고전주의가 지향하던 재현의 정확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아방가르드적인 현대 회화에서는 공간구성 원리로서 원근법이 차츰 사라지거나 공공연히 무시되었다. 회화적 공간은 이제 세계의 닮음꼴이나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고유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화가들은 더 이상 회화적 공간의 2차원성을 극복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회화적 공간성 그 자체, 즉 평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림들을 제작하게 되었다. 현대의 다양한 추상회화들은 회화적 공간에 대한 이처럼 변화된 개념 위에서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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