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 간추린 미학사

이번엔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플라톤은 회화와 시에 대해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회화는 테크네 - 인간적 제작활동 - 의 일환으로 간주했지만, 시는 신적 영감의 소산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도 일종의 테크네 라고 하면서, 시 역시 인간적 제작의 산물로 간주합니다.

시가 하나의 테크네로 간주된다고 할 때, 회화를 비롯한 테크네 일반과 마찬가지로 시를 짓는데도 일련의 규칙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시의 제작술에 대해 기술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詩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적 테크네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1) 색채와 드로잉을 통해 사물의 시각적 외양을 모방하는 테크네, 즉 회화와 조각과 (2) 운문(verse), 노래, 춤을 통해 인간의 행위를 모방하는 테크네, 즉 시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와 회화는 모두 모방적 테크네로 간주될 수 있겠는데, 이 두 활동의 차이라면 그 매체입니다. 말하자면, 회화는 색채와 드로잉을, 시는 운문을 그 매체로 사용합니다. 또한 운문으로 쓰여진 모든 것이 시는 아닙니다. 고대에는 시이외의 다른 저술들도 운문으로 쓰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시는 그 대상의 측면에서 역사나 철학과 구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역사는 개별적인 사건을, 시는 인간의 행위를, 철학은 진리를 다룹니다. 또한 시예술이라고 불리는 운문 중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차적인 관심이 되고 있는 것은 극(희극, 비극)과 서사시인데, 비극과 서사시는 그 행위의 진지함과 엄숙함에 있어서 희극과 구별되며, 다시 비극과 서사시는 그 양식에 있어서 극적이냐 아니면 서술적이냐에 따라 서로 구별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를 제작하기 위한 일련의 규칙을 제시하는 것을 <시학>의 주요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시학>의 초반에서 시의 장르에 대한 설명을 잠시 한 후, 나머지 대부분의 내용은 비극(tragedy)에 대한 이론으로 메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학>은 곧 "비극론"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제까지의 내용을 정리하여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의 정의는 "진지하고 엄숙한 인간의 행위를 극적인(dramatic) 혹은 공연의(performative) 양태로 운문을 매체로 하여 모방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비극, 곧 진지한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합니까? 물론 아무도 의무감에서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비극이 뭔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리라 생각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 <시학>에서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우선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방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우며, 모방의 인지는 즐겁다."


이러한 설명에서 보여지는 모방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플라톤의 그것과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플라톤이 모방적 테크네, 회화와 조각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를 했는지에 대해 상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플라톤이 회화와 조각을 "환영(illusion)의 창조다, 기만적인 눈속임이다" 라고 했던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 동물로서 인간에게 모방은 본능적이며, 모방을 알아 보는 것은 - 즉, 인지하는 것은 - 상당히 즐거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컨대 개의 그림을 보고 그것이 '개'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일종의 학습이라는 것입니다. 곧 모방은 일종의 학습 효과를 창출하기 때문에 즐겁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학습과 경탄은 즐거운 것이므로 그것들과 관련된 모든 것 또한 즐거운 것임에 틀림없다. 예컨대 회화, 조각, 시와 같은 모방작품은, 그것의 모방 대상이 즐거운 것이 아닐지라도 즐거운 것이 된다. 왜냐하면 쾌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모방 대상이 아니라 모방과 모방된 대상이 일치한다는 추론이기 때문이며, 그 결과 우리는 뭔가를 배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방이 즐거운 것은 그 대상이 아름답다거나 특별히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방을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최상의 즐거움은 학습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네요.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에 대한 견해 차이는 그들의 형이상학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진정한 지식은 개별자가 아닌 보편자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플라톤과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집 강아지, "진돌이"를 그린 그림이 있다고 합시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것을 보여주었을 때, "야! 진돌이다"하는 것을 인지하는 것보다는 "아! 개는 이렇게 생겼구나"하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지식을 얻고 있는 거라는 얘깁니다. 즉, 하나의 개별자로서 "진돌이"에 대한 인식보다는 보편자 "개"의 인식이 보다 가치 있는 지식의 습득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가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초월적 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보편자는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내에서 발견된다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할 때,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개체(the particular)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개체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때 형상(form)은 보편적인 속성, 혹은 본질적인 것을 의미하고, 질료(material)는 감각적인 물질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돌이"를 우리가 한 마리의 "개"로 인지하는 것은 하얗고 복스러운 털, 쫑긋한 귀, 씩씩한 네 다리를 가진 진돌이가 개의 보편적 속성, 즉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는 초월적인 세계나 이데아의 세계를 상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그가 질료와 형상을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형상없는 질료, 혹은 질료없는 형상을 내세운 적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구체적인 개별 사물들이며, 형상과 질료의 조화입니다.


[라파엘, <아테네학당> 1506]

[<아테네학당>의 부분]

이 그림은 16세기 초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이 그린 <아테네 학당>입니다. 플라톤이 세운 아테네 학당에는 당대의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중에서 화면의 중앙에 위치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봅시다.(오른쪽 그림) 그들의 제스츄어는 그들의 형이상학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지요. 즉, 이상계를 진정한 세계로 보았던 플라톤은 실재(reality)가 현실계 너머에 있다고 보는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개별자들 가운데 보편자가 내재해 있다고 믿으므로, 실재가 현실계에 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예술에 대한 논의로 돌아갈까요? 플라톤처럼 보편자를 초월적인 형상으로 파악할 경우, 화가의 그림, 즉 "진돌이"의 그림은 보편적인 실재, 즉 개의 형상과는 단절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대로 보편자가 개체내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질 경우, "진돌이"를 그린 화가는 개의 형상, 즉 보편적인 것을 추출하여 재생하는 일을 하는 존재가 됩니다. 즉, 화가의 작업이 보편자의 인식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회화는 일종의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플라톤에게서 완전히 무시당했던 예술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그 인식적 가치를 보상받을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보편적인 것의 인식이 개별적인 것의 인식보다 가치있다"는 입장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진지하다"는 견해를 표명합니다. 말하자면, 역사는 실제로 일어났던 개별적인 사건들에 관심을 두는 반면, 시는 어떤 보편적인 것, 혹은 개연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때 보편적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어떤 경우에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말하고 행위하는 방식"을 의미하며, 시가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이런 보편성입니다. 그러므로 시는 "보편적인 인간 행위의 모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방은 인간에게 자연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인간의 행위를 모방한 비극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준다"라고 했을 때는 모방이 주는 일반적인 쾌에 대해 말한 것이지, 비극이 주는 고유한 쾌를 말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비극의 고유한 쾌에 대해 분석하고, 이러한 쾌를 극대화시키는 방법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훌륭한 비극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플롯(plot)을 개연적이고 필연적으로 전개해야 합니다. 앞서 비극이 "보편적인" 인간 행위의 모방이 되기 위해서는 개연성과 필연성이 요구된다고 했습니다. 이때 "개연적"이라는 것은 그럴듯함, 즉 그 상황에서 있을 법한 사건의 발생을 말하고, "필연적"이라는 것은 어떤 원인과 그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플롯을 구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또한 비극의 주인공은 실수로 보편적 행운에서 불행에 이르러야 합니다. 즉 주인공의 불행이 운명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우연한 실수에 의해 주인공이 불행해지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 사람들은 그러한 불행이 자신에게도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 혹은 공포를 갖게 됩니다.

(3) 그리고 비극의 주인공은 특별히 악한 사람이거나 선한 사람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냥 보통사람, 정상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선한 사람이 불행에 이르는 것을 보면 관객들은 "저렇게 선하고 훌륭한 사람이 왜 불행에 빠지는가"하면서 반발하게 됩니다. 또한 태생적으로 악한 사람이 주인공이 될 경우에도 관객들은 분개합니다. "왜 악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가?"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불행하고 공포스러운 사건이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에게서 일어난 것을 본 관객들은 처음엔 공포를 느끼다가 나중에는 주인공의 불행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어, 나중에는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주인공의 불행을 바라보면서 함께 울기도 하고 그러지요. 그런데 이 연민의 감정이 공포, 증오, 분노와 같은 고통스러운 감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느껴질 때 연민은 일종의 쾌와 같은 것이 됩니다.


(4)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공포와 연민의 과정을 거친 후 느끼게 되는 쾌를 기술하면서 "카타르시스"(katharsis)라는 말을 사용하고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카타르시스"가 곧 비극의 고유한 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카타르시스"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선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하는데, 그중 가장 유력하고 전통적인 해석은 카타르시스를 의학적 은유로, 즉 "배설"의 의미로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은 "공포와 연민을 통하여 감정의 적절한 배설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극은 이런 감정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청중의 정신 건강에 해방의 기쁨을 주는 일종의 치료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평소에 가슴 속에 쌓아 두었던 스트레스나 분노와 같은 유해한 감정을 비극을 봄으로써 제거해 줄 수 있다는 말이지요. ㄴ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이 사건의 고조와 급전을 통해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데 강력하게 기여할 수 있도록 설정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始, 中, 綜의 단계로 구성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비극의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정리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테크네로, 그중에서도 모방적 테크네로 간주됩니다. 그러면서 모방이 가진 인식적 가치를 언급하여 플라톤의 모방적 테크네에 대한 평가절하와 대조적인 견해를 보여줍니다. 또한 그는 "시는 역사보다도 철학적"이라고 말함으로써 시의 인식적 지위를 철학의 그것과 동등한 것으로 높여 줍니다. 결국, 시는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의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고, 인식론적 측면에서 철학적 지위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와 회화를 동일한 모방적 테크네의 범주에 넣었다고 하여, 시와 회화를 동일시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회화는 여전히 플라톤의 비난에서 구제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근거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고대 말기의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의 미학을 통해 회화의 가치를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회화가 <시학>과 같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은 약 20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지게 됩니다.


덧글

  • 지윤 2015/10/16 12:21 # 삭제 답글

    감사합니다. 쉽게 설명해주셔서 공부하는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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