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학이란 무엇인가? C.S.퍼스와 기호학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이런 제목을 한 책도 있고(김경용, 1994) 여러 입문서들이 시중에 소개되고 있지만, 여전히 궁금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기호' 내지는 '기호학'이란 개념의 포괄성, 일반성 떄문일 것이다.

기호학이 무엇인지 답하려면, 무엇보다도 기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자, 기호(sign)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 상용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쓰고 있으니, 일단 그것의 보편적인 정의를 모색해보자.

1. '기호'는 상징(symbol), 징후(symptom), 표식(mark), 신호(signal) 등 유사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다. (이렇다고 합의하자는 얘기다.)

2. 그렇다 할 때, '기호'의 가장 포괄적인 정의는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나타내는/대리하는 어떤 것"이다. (이쯤에서 내 입장을 밝히자면, 난 기호학자 찰스 퍼스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성 어거스틴 시절부터 이런 식의 기호 개념이 있었고 이후 중세, 근대철학으로 이어졌다. 기호학사를 훑는 일은 지금의 화두를 너무 확장시키는 거니까 되도록 하지 말자. ^^

암튼, 고대이래 많은 철학자들은 어떤 사물 혹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is or present), 기호가 그것을 나타내고 지시하고 재현한다(represent)고 보았다.  

3. 소쉬르는 '기호'를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결합이라 정의했다. 반면 퍼스는 '기호'를 표상체(representamen), 대상, 해석체(interpretant) 세 요소의 결합이라 보았다. 그런데 비록 정의는 이렇게 했지만, 그들은 종종 '기표'나 '표상체'를 '기호'라 부르기도 한다. 이건 우리도 수시로 저지르는 혼동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2에서 말했듯이 "다른 어떤 것을 나타내는 어떤 것"이라는 전통적인 기호 정의는 기호를 '기호표현(기표)' 내지는 '기호전달체(sign-vehicle)'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특히 퍼스는 '표상체' 대신 '기호'라는 말을 자주 쓴다. (혁명적인 언어학자였던) 소쉬르에 비해 퍼스는 비교적 전통적인 관점, 즉 "aliquid stat pro aliquo(다른 것을 나타내는 모든 것)"으로서의 기호정의에 충실했고, 바로 그 지점에서 기호학적 탐구를 출발하고 있다.

[* 말 안해도 알겠지만, 퍼스가 별로 혁명적이지 않거나 하다는 얘긴 절대 아니다. 일단 소쉬르와 연구분야가 달랐고, 또 소쉬르가 기존의 언어학을 거의 완전히 부정하면서 자신의 언어학 체계를 구축한 것과 비교하면, 퍼스의 혁명성은 좀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얘기다... 퍼스는 쫌 마~니 독창적이어서 종종 난감하다.]


4. 일단 정리해보면, "기호는 그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나타내는(혹은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어떤 것이며, 그것은 상징, 징후, 신호, 표식 등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포괄적인 용어이다."

5. 이제 오늘날 통용되는 기호학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퍼스의 기호정의를 잠깐 보도록 하자.


"기호 혹은 표상체는 어떤 관점 혹은 능력에서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나타내는 어떤 것이다. 기호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즉 그 사람의 정신에 동등한 기호, 혹은 아마도 더 발전된 기호를 창출한다. 그 기호를 나는 첫번째 기호의 해석체라 부른다. 기호는 어떤 것, 즉 그 대상을 나타낸다. 그것은 대상을 모든 관점에서가 아니라, 모종의 관념, 즉 내가 종종 표상체의 근거(ground)라고 부른 것에 의거하여 나타낸다."(CP 2.228)




6. 퍼스의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기호 정의는 기호학이 다루어야 할 주제가 대단히 광범위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 퍼스의 일반적 기호학은 종종 "모호성의 기호학"이라 불린다. 여기서 '모호성(vagueness)'은 부정적이기보다 긍정적인 함의를 갖는 퍼스의 전문용어다. 요건 골치아프니까 스킵하자.]

6.1 기호-전달체, 즉 표상체가 나타내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당연히) 표상체 자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소쉬르 정의에서처럼) 정신적 개념(mental concept)도 아니다. 퍼스에 따르면 그것은 기호의 '대상'이고, 객관적인 존재자이다. 우리는 흔히 그것은 실재 내지는 현실(reality)과 동일시한다. 요 부분은 특히 골치아프다.[왜냐하면 퍼스의 '대상' 혹은 '실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객관적이지도 않거니와, 주관적이라고 말해도 무방한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스킵하자.] 하지만 전통적 기호개념에 충실했던 퍼스는 소쉬르와 달리 '대상'이라는 2번째 항을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자들이 했던 것처럼 퍼스는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이 무엇인가?" 즉 "실재란 무엇인가?, 모든 존재의 원인인 신은 존재하는가?"하는 형이상학적 탐구를 했다.

=> 따라서 퍼스처럼은 아니더라도 "뭔가가 있고, 우린 그것에 대해 (언어기호로) 얘기하고 (이미지기호로)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형이상학적/존재론적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래야 경험과학은 물론이거니와 윤리학과 미학도 성립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왜냐하면 이른바 '실재'를 가리키는 기호에 대한 정확한 해석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6.2 다른 한편, "표상체가 대상을 나타낸다 혹은 지시한다"외에 퍼스는 "표상체가 누군가에게 나타낸다"고 말했다. 기호 혹은 표상체는 누군가에게 해석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이 '어떤' 다른 것을 나타내고 있는지 어떤 해석주체가 반드시 해석하게 되어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해석의 문제, 해석주체 및 주체성(subjectivity)의 문제가 발생한다. 아~ 복잡하다. 이쯤되면 전통철학에서 다루는 거의 모든 문제가 퍼스의 기호정의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것이다. 근데 퍼스의 프래그머틱한 기호학에서는 주체가 그냥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연속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그냥 주체성이 아니라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기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설명도 일단 스킵하자.]

=> 그런데 (후기 퍼스 기호학에 주로 주목하면서) 여러 기호학자, 언어학자, 커뮤니케이션 이론가들은 "발신자-메시지-수신자"라는 커뮤니케이션 메커니즘 분석에 퍼스의 저술을 많이 참조했다. (그중에는 로만 야콥슨, 움베르토 에코 등이 있고, 롤랑 바르트, 쟈끄 데리다, 질 들뢰즈 등 많은 후기구조주의사상가들이 퍼스의 영향을 받았다.) 가령 야콥슨의 다음 도식을 보자.

여기서 별로 못알아볼 용어는 없는 것 같다. 발신자, 수신자, 메시지, 접촉, 코드, 컨텍스트. 그런데 야콥슨이 "context"를 그냥 커뮤니케이션의 맥락이라고만 하지 않고, "지시된 맥락(context referred)"라고 하는데 주목하자. 발신자와 수신자가 일정한 코드(영어, 한국어 문법도 코드가 되겠다)로 의사소통을 할 떄, 전해지는 메시지가 지시하는 상황 혹은 대상이 곧 '컨텍스트'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야콥슨은 (내가 알기로 최초로) 퍼스를 도입하여 구조주의 기호학의 한계를 극복했던 위대한 기호학자이자 문화이론가다. 위의 도식은 아주아주 유명한 것이고.
7. 결론적으로, 기호학은 아주아주 광범위한 분야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최근 활발하게 탐구된 커뮤니케이션론은 물론이고, 주체와 주체성(상호주체성) 문제, 해석 혹은 수용의 문제, 실재와 존재론의 다양한 문제, 또 이와 관련하여 진리와 가치의 문제까지도 기호학의 연구분야에 속한다.

기호학의 포괄성은 그것의 일반성 혹은 상식적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기호학이라는 학문분야라는 것이다. 그래서 퍼스는 (후기에 이르러) 자신의 프래그머티즘을 기호학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해, 기호학을 통해 프래그머티즘이 좀더 완결적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프래그머티즘을 "비판적 상식주의(Critical Common-Sensism)"라 불렀다.

* 마지막으로 보너스~! [출전: Daniel Chandler's Semiotics for Beginners]

퍼스의 (익숙하지 않은) 전문용어들을 좀더 익숙한 용어로 바꾼 삼각형이다. 챈들러는 '해석체'대신 '의미'[B]를, '표상체'대신 '기호-전달체'[A]를, 그리고 '대상' 대신 '지시대상(referent)'[C]을 사용했다. 챈들러의 용어를 리챠즈와 오그덴(1923)이 사용했던 것과 비교하는 것도 의미있다. 그들은 '표상체' 대신 '상징'을, '해석체' 대신 '사고 혹은 지시체(reference)'를, '대상' 대신 '지시대상'을 사용했다. 그들의 용어를 참조한 챈들러 버전이 훨씬 쉽고 친숙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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