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이미지: 읽는 문화와 보는 문화 사이에서 C.S.퍼스와 기호학

[* 이 글은 2010년 9월 <월간미술>에 게재한 기사입니다. 인용시엔 출처를 밝혀주시길~~ ^^]

#1. 언어적 전환과 시각적 전환

리처드 로티는 철학의 역사가 일련의 "전환들," 즉 "오래된 문제들이 물러가고 새로운 문제들이 떠오르는" 계기들로 점철되어 있다고 보았고, 1979년 출판한 저술에서 자신의 시대를 "언어적 전환"의 시기라고 진단했다.[Richard Rorty,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9 참고] 20세기 중반 이후 유행한 기호학과 후기구조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은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반면 1980~1990년대에 언어와 이미지의 상관성에 대한 저술을 다수 출판했던 W. J. T. 미첼은 그의 시대를 "회화적 전환pictorial turn" 혹은 "도상적 전환iconic turn"이 이뤄지는 시기라 판단했다.[W. J. T. Mitchell, Picture Theor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 참고.] 그렇다면 로티나 미첼의 진단 이후 20년 이상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떤 전환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앞서 말한 두 가지 전환이 (혹은 둘중 하나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면, 그중 어떤 것이 우리 시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라 할 수 있을까?

21세기 들어선 이후 "시각적 전환"이 더 힘을 얻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이 가속화되면서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문자매체보다 시각매체의 호소력이 날로 강력해지고 있다. 안방과 거리에서 매일 접하는 현란한 광고이미지뿐만 아니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빠져드는 컴퓨터게임의 비쥬얼, 더 잘 팔리기 위해 날로 더 세련되지는 공산품 디자인을 보면 우리는 그야말로 "보는 문화" 시대의 한복판에 서있는 것 같다. 최근 미술계 안팎에서 시각문화Visual Culture에 관한 담론이 범람하는 것도 우리시대 문화의 성격을 설명해준다.

그런가 하면, 로티와 기타 이론가들이 언급했던 "언어적 전환" 역시 동시대의 시각문화를 설명하는데 유효해 보인다. 앞서 말한 로티의 저술이 등장하기 한참 전인 1950년대부터 바르트 같은 기호학자는 시각적 이미지들을 보는 대신 읽는 방법을 소개하기 시작했다.[Roland Barthes, Mythologies, France, Editions de Seuil, 1957; <현대의 신화> 동문선, 1997 참고] 바르트는 언어만 아니라 그림이나 사진도 독해대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가령, 프랑스 국기에 경례를 하는 흑인병사의 사진은 단지 군인의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종차별이 없는 위대한 제국, 프랑스를 신화화하는 기호다. 이미지를 읽기 시작한지 반세기가 흐른 오늘날, 시각문화는 단순히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찬찬히 읽고 숨어 있는 전략을 간파해야할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시각이미지조차 '언어' 혹은 '텍스트'라 부르고, 종류는 다르다 하더라도 말과 마찬가지로 기호로 보는 것이 미술계의 상례가 되었다.


#2. 언어기호와 시각기호

말과 이미지를 동일하게 기호로 볼 것인가, 그리고 양자 모두 기호라면 말과 이미지는 유사한가 다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크게 엇갈린다. 현대기호학을 정초한 두 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찰스 S. 퍼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다. 소쉬르는 언어만이 정당하게 기호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한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arbitrary 결합으로 구성된다. 이때 기표는 소리나 문자 같은 기호전달체sign-vehicle고, 기의는 그것이 의미하는 개념이다. 언어의 의미작용이 자의적이라는 것은, 한 단어의 의미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의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단어와의 차이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언어의 자의성 때문에 특정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선 반드시 그것과 관련된 관습 혹은 코드에 대한 학습이 요구된다. 하지만 일단 익숙해지면, 언어는 가장 효과적인 의사소통 수단이 된다. 반면 시각이미지는 대체로 그것이 의미하는 대상과 외관상 닮았기 때문에, 양자의 결합은 자의적이라기보다 자연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각이미지의 의미는 해독법을 학습하지 않더라도 파악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소쉬르의 체계에선 사회적 관습이 아닌 자연적 닮음에 의존하는 시각이미지를 기호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말이 가진 종류의 인지적, 소통적 기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기호정의]


말과 이미지 중 무엇이 더 우월한가, 양자는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는 미학사에서 문학과 미술의 비교논쟁으로 등장했었다. 로마의 시인 호레이스에게서 유래한 "시는 회화와 같이(ut pictura poesis)"란 이설은, 문학에 필적하는 미술의 지위를 주장하기 위해 17세기 프랑스 미술아카데미에서 성립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양자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말과 이미지의 차이 자체를 작품의 소재로 삼았던 미술가들이 있었다. 가령 르네 마그리트의 <꿈의 열쇠>(1935)는 소쉬르가 말한 언어의 관습성을 한 눈에 보여준다. 여기서 마그리트는 관습에 의존하는 언어적 의미작용과, 이에 비해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회화적 재현의 차이를 시각화하고, 이런 차이를 다시 제목 또는 언어기호를 통해 무의식의 층위, 즉 꿈과 연결시키고 있다.

[마그리트, <꿈의 열쇠>, 1935]


소쉬르와 달리 퍼스는 말과 이미지의 차이를 근본적이라 보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퍼스는 기호전달체와 지시대상의 관계를 중심으로 세 종류의 기호를 분류했다. 즉 도상은 양자의 닮음에 근거하여 해석되고, 지표는 양자의 물리적 연관에 의해 해석되며, 상징은 관습이나 규약에 따라 해석되는 기호다. 도상-지표-상징의 삼분법에서 말은 상징에, 이미지는 도상에 주로 해당한다. 세 가지 기호는 각각 다른 특성을 갖고 있지만, 모두 공히 어떤 대상의 기호로 해석되어야 할 사물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찰스 S. 퍼스의 기호 정의]

기표와 기의의 이항대립을 설정했던 소쉬르와 다르게, 퍼스는 한 기호가 표상체representamen, 대상object, 해석체interpretant의 삼항으로 구성된다 보았다. 여기서 표상체와 대상은 각각 기호전달체와 지시대상에 해당한다. 해석체는 하나의 표상체를 해석한 결과인 동시에 또 하나의 새로운 표상체 기능을 하는 것이다. 퍼스는 해석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기호의 해석을 해석자의 실천적 맥락에 개방적인 과정으로 만들었다. 그는 언어 혹은 상징이 가진 인지기능만 중요하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퍼스는 상징이 아닌 기호, 즉 도상과 지표의 인지기능에 주목했다. 그는 추상적인 상징의 내용을 한눈에 보여주는 도상과 지표의 소통기능을 높이 평가했다. 요컨대 퍼스에게 있어서 기호는 언어에만 국한되지 않고, 언어의 추상적 내용을 가시화한 사례로서 이미지도 포함한다. 20세기 중반 “언어적 전환”을 주도했던 후기구조주의자들은 비언어적 기호의 종류를 분류하고 기호의 맥락적 읽기를 강조한 퍼스 기호학에서 이론적 유사성을 찾곤 했다.


#3. 시각예술에 등장하는 언어기호의 두 양상

퍼스의 기호삼분법에서 본 것처럼, 말과 이미지를 동일하게 기호로 간주한다 해서 그것들의 현상적 차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은 그러한 차이를 적극 활용했었다. 최초로 문자를 회화에 도입한 피카소는 이미지를 위한 캡션 혹은 설명문처럼 문자를 활용하기도 했고, 하나의 시각적 디자인으로서 문자가 인쇄된 종이를 꼴라쥬하기도 했다. 전자의 사례로는 <마졸리>(1911-12)가 있다. 작품 하단의 “Ma Jolie," 즉 ”내 사랑“이란 문구는 마치 보도사진의 캡션처럼 그림의 내용을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 그림은 기타를 치는 여인을 분석적 큐비즘 방식으로 재현한 것인데, 여기 삽입된 “Ma Jolie"는 그림의 대상이 당시 피카소의 연인이었음을 설명해준다. 피카소가 미술에 언어적 요소를 도입한 두 번째 방식의 사례로는 <유리잔과 쥬스병>(1912)을 들 수 있다. 화면 중앙에 있는 문자열 ”SUZE"는 “Ma Jolie"처럼 캡션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나머지 꼴라쥬 부분에 포함되어 있는 신문기사들은 언어적 의미작용을 하는 대신, 피카소가 실험 중인 회화적 재현의 일부가 되고 있다.

[피카소, <마졸리> 1911-12]
[피카소, 유리잔과 쥬스병, 1912]

큐비즘, 다다, 미래주의 같은 모더니스트들 덕분에 현대미술에서 언어나 기타 상징들을 접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게 되었다. 미술가들이 언어를 시각예술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방식은 피카소가 취했던 두 가지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이응노의 <문자추상> 시리즈는 피카소의 두 번째 방식, 즉 언어의 시각화에 해당한다. 이응로의 화폭에서 문자는 본래의 언어적 소통기능을 상실하고 하나의 시각이미지로 변모한다. 김홍주도 글씨같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그의 <무제>(1994-95)는 그가 자주 그렸던 풍경과 문자의 결합 또는 이중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김홍주의 작업은 언뜻 이미지를 문자화한 상형문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문자의 이미지화 또는 시각화는 확실히 상형문자와 다르며, 서예나 타이포그래피와는 더더욱 구별된다.

[김홍주 <무제> 1994]

[존 하트필드,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축구공> 1919]

 언어가 현대미술에 도입된 것은 피카소가 시도했던 첫 번째 방식으로 주로 나타났다. 베를린 다다의 포토몽타쥬나 1960~70년대 개념미술이 이런 방식의 대표적 사례다. 존 하트필드의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축구공>(1919)은 베를린 다다그룹의 급진적인 입장을 표출하기 위해 만든 정간지의 표지다. “모든 사람은 축구공”이란 헤드라인 옆에 축구공의 몸통을 가진 사람이미지가 등장하고, 하단엔 펼쳐진 부채 안엔 당대 권력자들의 사진이 “누가 가장 예쁜가?” 하는 조소어린 문장 아래에 몽타쥬되어 있다.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말과 이미지가 공조하고 있는 셈이다. <당신의 몸은 전쟁터>(1989)로 유명한 바바라 크루거의 작업도 이런 경향의 연속선상에서 읽을 수 있다. 하트필드의 작업에 비해 정치적 쟁점이 국지적, 구체적이 되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일 수 있으나, 암시적인 내용의 흑백이미지와 강렬한 문구의 병치를 통해 크루거는 재현의 정치를 효과적으로 실천하였다. 시각예술에 편입된 언어의 비중이 최고조에 이른 건 1960년대 개념미술에서였다. 조셉 코주스는 <하나이자 셋인 의자>(1965)에서 마그리트와 유사하게 말과 이미지의 상이한 의미작용을 다루었다. 단어 ‘의자’가 지시하는 것은 의자의 사전적 정의가 기술하는 추상적 개념이다. 반면 의자의 사진이 재현하는 것은 중앙에 놓인 구체적 대상으로서 의자다. 퍼스식으로 말해 전자는 상징이고 후자는 도상이라면, 코주스는 “하나인 동시에 셋인” 의자들을 통해 도상이 상징의 대상인 추상적 개념을 가시화한다는 퍼스의 기호학을 구현하고 있는 듯하다.

[조셉 코주스, <하나이자 셋인 의자> 1965]



#4. 새로운 전환의 시대를 향하여

이 글을 시작하는 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우리는 시각문화의 급속한 부상을 경험했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시각성의 우위는 미디어테크놀로지에서 비롯한 것이다. 미술계에서 미디어아트의 약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을 맺으면서 간단히 “시각적 전환”을 선언할 수가 없다. 그 이유 역시 미디어테크놀로지에 있다. 1960년대 북미의 급진적인 작가들이 정체성 정치의 수단으로 비디오카메라를 사용한 이후, 카메라와 캠코더가 미술가들의 주요 표현수단이 되었고 영화는 미술의 가장 의미있는 타자가 되었다. 내러티브를 포함하고 있는 실험적 비디오나 영화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효과적으로 공조하여 소통능력을 발휘하는 말과 이미지를 발견한다. 동시대 미술에서 말과 이미지의 관계는 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언어가 이미지처럼 보는 문화가 되기도 하고 이미지가 언어처럼 읽는 문화가 되기도 하는가 하면, 각각은 서로의 의미화 작용을 상보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 모든 양상은 언어와 이미지를 모두 기호로 바라볼 수 있게 한 “언어적 전환”을 통해 가능했다.

[제프리 쇼, <레져블 시티> 1989-91]

제프리 쇼의 디지털아트, <레저블 시티>(1989-91)는 시각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이 결합된 또 다른 양상으로 등장했다. 관람자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거리의 풍경 대신 3차원 입체 영상으로 다가오는 커다란 문자들을 경험하게 된다. <레저블 시티>의 가상현실은 기존의 시각과 언어의 결합과는 차원이 다르다. 온몸으로 겪어야 한다는 점에서 2차원 영상의 감상과도 다르다. 뉴미디어는 문자를 읽고 볼 뿐만 아니라 초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미래의 디지털아트가 어떤 새로운 전환을 초래할지 아직 단정할 수 없다. 현재로선 언어적 전환 및 시각적 전환과 함께 미술계도 눈에 띠게 변모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전에 출현했던 말과 이미지의 결합과는 다른 형태의 결합가능성과 기존의 소통형식과는 다른 종류의 소통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가져볼 뿐이다.


덧글

  • fivebox 2012/06/28 02:41 # 삭제 답글

    아는것 같아도 막상 설명하려면 아리송하던 미술과 기호학ㅜ
    작품들과 더불어 이렇게 쉽게 풀어 설명해주시니, 정말 많이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을 읽으니 내셨다는 책을 너무 읽어보고 싶네요.
  • mijung kang 2012/07/10 13:43 # 답글

    캄사캄사~~ 제 책에 관심을 보이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내용이 매우 전문적이긴 한데, 퍼스 기호학(=사실상 퍼스 철학 전반)에 대해 일람할 수 있도록 제 나름대로 재구성하여 썼습니다. 모험심이 많으시다면 시도해보셔도 좋으실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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