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크르의 변주곡: 하광석의 <Reality> 시리즈에 관해 Art criticism

실재가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을 때, 노스탤지어가 충만한 의미를 띤다.

 -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크르의 선행(先行)" (1981)

하광석의 근작, <Reality-Shadow #2>(2009) LCD 모니터와 반쯤 녹은 초가 있는 촛대로 구성되어 있다. 모니터 위엔 촛대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 같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그것이 단지 모니터 영상일 뿐 그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교묘하게 모니터와 촛대라는 두 오브제를 연관시켜 관람자의 착각을 유도한다. 그의 의도대로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무심하게 "촛대와 그림자의 배열"로 보아 넘긴다. 모니터에 비친 영상을 사람들이 그림자로 여긴다는 사실은 회화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관념을 상기시킨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림을 실재의 재현이자 반영으로, 혹은 실재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여겨왔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숱한 미술가들이 이 사실을 부정하고자 분투해왔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미지를 한낱 가상(illusion)으로, 실재의 그림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작품 앞에 적어도 3초 이상 머물렀던 관람자들은 모니터 영상이 허상도, 그림자도 아님을 이내 발견했을 것이다


[하광석, <Reality-Shadow #2> ; <Reality-Shadow #6>]
하광석의 "Reality-Shadow"는 재현에 대한 고정관념의 반성에서 촉발된 사고의 유희다. <Reality-Shadow #2>의 촛대엔 불이 꺼진 초가 서있고, <Reality-Shadow #7-1>의 나뭇가지엔 나비가 없다. 반면 그림자(처럼 보였던 이미지)에는 촛불이 켜져있고 나비가 날아다닌다. <Reality-Shadow #6>는 좀 더 드라마틱하다. 설치된 오브제들은 껍데기처럼 남아 있는 의복들이다. 마치 옷을 입은 투명인간들처럼 보이는 이런 종류의 존재자들은 통상 실체적이라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영사막의 그림자들이 더 실체적으로 보인다. 그것들은 적어도 어떤 실체적인 것, 즉 실재의 재현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갓 가상에 그쳐야 할 이미지가 더 있을 법하게 보이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은, 하광석 작품에 등장하는 그림자들이 실재의 재현이 아니라 시뮬라시옹임을 일러준다. "Reality-Shadow" "리얼리티와 그림자"가 아니라, "리얼리티로서의 그림자"를 의미한다. <Reality-Shadow> 시리즈의 그림자(처럼 보이는 이미지)는 주로 LCD 모니터 상에 등장함으로써 그것이 원본 없는 복제, 즉 시뮬라크르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바야흐로 유비쿼터스 세상이 도래하고, 심드렁한 현실과 그럴싸한 이미지환경을 수시로 넘나들던 사람들은 결국 이미지의 호소력에 설득당하고 만 것인가? 그렇지 않다. 동시대인들에겐 이미지 즉 그림자가 바로 실재다. (<Reality-Shadow #2>를 본 여러 관람자들이 촛대 위에 불을 붙여 놓고 갔단다. 그야말로 미디어가 메시지, 미디어이미지는 하이퍼리얼리티인 시대가 된 것 같다.)

 2007년 이후 하광석은 <푸른 눈의 응시> 시리즈에서 시선(look)의 권력에 대해 다루고 있다. 주로 천정에, 때로는 6미터 상공에 설치됐던 푸른 눈들은 바라보기 행위가 행사하는 힘을 가시화한 것이다. 우리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시선들은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고 지배한다. 우리의 생활공간 도처에 설치되어 있는 CCTV 덕분에,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언급한 판옵티콘 개념이 더욱 완벽해진 것 같은 게 오늘의 현실이다. 숱한 바라봄의 대상이 되어온 사람들은 심지어 바라보는 시선이 없을 때조차도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시선을 의식하여 움찔거리고, 때론 스스로 감시자가 되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기도 한다. 하광석은 현대적 삶의 주요 국면을, 사람들을 주시하며 쉴새 없이 안구를 굴리고 있는 푸른 눈으로 희화화한 셈이다.


[하광석, <푸른 눈의 응시>]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압도하고 심지어 앞지르는 것 같은 요즘, 바라봄의 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해졌다. 사이버공간은 종종 판옵티콘의 탈출구가 되곤 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감시대상인 현대인은 인터넷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바라봄의 대상에서 주체로 자리바꿈하여 타인을 감시하고 공격하며, 때로는 폭력을 행사한다. 심지어 권력자들도 그러한 시선의 폭력을 피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이 더 공공연한 바라봄의 대상이 되곤 한다. 한마디로 말해 상호감시체제, 즉 신옵티콘과 맞물림으로써 판옵티콘의 기제들은 더욱 정교하고 공고한 감시장치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중의 시선은 권력자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이미지 혹은 시뮬라크르를 향해있다. 그런데 대상 그 자체를 사람들은 알 수 있는가? 과련 그런 것이 실제로 있는가? 이미지가 실재가 되고 시선의 권력이 더욱 강력해진 시대에 이런 종류의 질문은 수사의문문으로 들릴 뿐이다.

2002년 뉴욕에서 수학할 당시, 하광석은 처음으로 <Reality-Pond> 작업을 했다. 천정에 달린 빔프로젝터가 무언가를 비추고 있지만, 작가가 등장하여 안료를 칠하기 전까지 관람자들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차츰 작은 연못이 만들어지고, 마치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물고기 형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러 물고기들 가운데 혼자서만 뒤로 헤엄치는 물고기 한 마리가 있다. 홀로 역행하는 시·공간에 놓인 물고기는, 관람자들이 보고 있는 것이 시뮬라크르란 사실을 일깨우는 장치인 동시에, 시간과 공간에 대한 현대인의 감각이 예전 같지 않음을 표현하는 알레고리다. 이 시기에 하광석은 시·공간성에 대해 고찰하는 작업에 몰두했었고, 다분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현대인의 지각작용에 관한 여러 작품들을 선보였다. 기계문명의 발달은 사람들의 지각방식을 크게 바꿔 놓았다. 기차와 비행기 같은 운송수단도 이에 한 몫 했지만, 카메라는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TV, 비디오, 영화, 인터넷, 그리고 전광판의 광고 등 범람하는 미디어이미지들은 동시대적 생활환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시뮬라크르의 선행(precesseion)을 확신하는 한편, 미래를 현재로, 과거를 미래로 느끼고 순간적인 공간이동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

<Reality-Stroke> 시리즈는 2008년 이후 작가가 시도해온 사진작업이다. 이 시리즈의 작품들은 마른 나뭇가지와 나뭇잎 같은 소박한 대상들을 아주 얇은 한지에 인화한 후, 구겨진 인화지를 그대로 레진으로 굳혀 아크릴 판에 부착해 놓은 것이다. 이렇게 만든 결과물에선 사진의 기록성보다는 회화적 표현성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하광석이 추구하던 바라보기와 관련된 아이러니가 여기서도 발견된다. <Reality-Stroke>에선 사람들이 기대하는 카메라의 사실증명기능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카메라가 보여주는 세상에 대해 의심을 품어봐야 한다. 사진도 회화와 다를 바 없는 허상이 아닌가 하는 작가의 질문은, 이른바 실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에서 이미 태동한 의구심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광석의 <Reality> 시리즈는 어쩌면 편재하는 시뮬라크르의 세상을 살면서 그가 경험하는 실재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것일지 모른다. 촛불이 실제로 켜져있는가, 아니면 꺼져있는가? 나비가 날아오른다는 것은 그저 작가의 꿈일 뿐, 화병엔 앙상한 나뭇가지만 꼽혀있지 않은가? 거의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시뮬라크르의 힘은 반동적으로 실재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필자가 갖고 있는 향수를 작가의 작업에 투사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특히 <Reality-Shadow> 시리즈를 보자 마자 동굴의 우화를 퍼뜩 떠올리면서 보드리야르가 아닌 플라톤에게 한 표 던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작가와 관람자로 하여금 실재에 대해 궁금하게 만들었든지 간에, 하광석의 의문은 관람자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흡인력을 지녔다. 각 작품마다 돋보이는 그의 유머와 위트가 메시지 그 자체인 미디어와, 실재를 앞지르고 있는 시뮬라크르에 대해 반성하도록 관람자들을 유인하기 때문이다.


[*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제4기 입주작가 하광석의 작품세계에 대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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