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 인간 소통의 열쇠] 기호, 인간, 사회 C.S.퍼스와 기호학

1. 기호, 인간, 사회


기호학이 학계 안팎에서 널리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한국 학계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1990년대가 기호학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당시 기호학은 아카데미에서만 열풍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운동 실천현장에서도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때 기호학이란 제명 하에 활발하게 탐구되던 학문분야는 주로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과 이를 급진적으로 발전시킨 후기구조주의(poststructuralism) 사상이었다. 많은 사회 및 문화비평가들은 자크 데리다, 자크 라캉, 미셸 푸코 같은 학자들의 후기구조주의 이론을 수용하여 사회문화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도구로 삼았다. 20세기 중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등장한 후기구조주의는 이론바 기호학적 전환(semiotic turn)’이라고 할 수 있는 학문적 변혁을 주도했다.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세계의 본질이나 인생의 목적을 탐구하는 것보다 언어사용을 통한 의사표현과 그 해석의 기제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핵심적인 의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술을 하나의 권력행위로 규정하는 푸코의 담론이론(discourse theory)은 철지난 맑스주의의 훌륭한 대안으로 보였다. 푸코는 맑스처럼 자본 또는 물질이라는 확고한 토대를 상정하는 것보다 명시적이거나 함축적인 언어의 의미작용과 그 구조를 파헤치는 것이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더 적절한 방법이라고 간주했다. 언어적 표상의 배후에 있는 경제적 토대는 그것이 과연 실재하는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실체가 확고부동해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의 언술이 지시하는 바는 그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 발화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후기구조주의는 불변하는 어떤 실체를 상정하기보다는 그 실체로 여겨지는 것을 표상하는 기호, 특히 언어의 의미작용과 그 구조를 연구하는데 치중했다는 점에서 기호학적이라고 하겠다.

물론 후기구조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는 기호학자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소쉬르의 언어학을 더 정치하게 발전시킨 루이스 예름슬레우, 찰스 S. 퍼스의 기호학을 계승한 찰스 모리스, 소쉬르와 퍼스의 기호학적 사유를 모두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의사소통 모델을 제시했던 로만 야콥슨처럼 기호, 특히 언어의 의미작용 분석에 몰두했던 학자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기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학문은 주로 이와 같은 학자들의 이론이다. 그런데 서두에서 후기구조주의 철학이 1990년대 유행한 기호학을 대표한다고 한 것은 기호학을 보다 큰 틀에서 조망하려는 이 글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는 언어학이나 언어철학 중심의 협소한 기호학이 아니라 20세기 후반을 풍미한 기호학적 전환에 주목함으로써 기호를 비단 언어현상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 및 문화현상 전반으로 확대시켜 보고자 한다.

언어는 가장 대표적인 기호 양태이다. 그런데 말과 글의 형식을 취한 언어 기호 외에 이미지나 촉감 같은 비언어적인 기호도 있다. 어떤 인공물을 기호라고 간주하는 것은 그것이 그 자체 이외의 다른 것을 나타내거나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의 기호는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medium)의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 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가령 신호등의 적색불은 그것 자체가 아닌 멈춤이라는 개념을 지시한다. 따라서 신호등이 적색으로 바뀌는 것을 본 운전자는 서서히 브레이크를 밟아 자동차를 멈춘다. 기호에 대한 이런 포괄적인 정의에 따르면 반드시 언어만 기호로 간주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비언어적인 이미지가 보유한 소통 능력이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언어적 소통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소통도 한다. 즉 우리는 상대의 말을 듣는 동시에 표정과 몸짓을 보고 이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해석한다. 상대가 똑같은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한다 해도 그의 안색이나 행동거지가 평소와 달리 풀이 죽어 보인다면, 우리는 아마도 혹시 어디 편찮으세요?”하며 되물을 것이다. 요컨대 오감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현상이 기호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 원시시대부터 인류는 부족공동체를 형성하고 서로 힘을 겨루어 서열체계를 만들어 왔다. 이와 같은 사회적 또는 정치적 인간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기호를 통한 의사소통이다. 러시아의 기호학자 로만 야콥슨은 다음과 같이 의사소통 모델을 제시한다.

발신자와 수신자는 메시지를 주고받음으로써 의사소통을 한다. 이때 메시지는 안녕하세요?” 같은 언어적인 것일 수도, 불편한 기색이 가득한 표정처럼 비언어적인 것일 수도 있다. 메시지 또는 기호는 그 자체만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서로 접촉을 통해 교감을 형성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코드가 있어야 한다. 우리말로 규약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 코드는 한글이나 영어의 문법에 해당하기도 하고, 흔히 코드가 맞는다, 안 맞는다.”라고 하는 것처럼 문화적인 성향이 될 수도 있다. 같은 코드를 공유한 사람들이 동일한 기호를 사용한다고 해도 맥락이 달라지면 의미가 미묘하게 변화한다. 야콥슨은 언어적 소통을 주로 염두에 두고 이런 모델을 제시했지만, 이 모델은 사람들의 몸짓이나 화가의 그림 또는 누군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침팬지처럼 군집을 이뤄 살고 구성원 간에 신호를 주고받는 체계를 보유한 동물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동물들의 군집을 사회라고 부르지도, 그들의 신호체계를 언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인간과 침팬지 사이에서 발견되는 기호학적 차이는 그들의 신호가 인간의 언어에 비견할 만하지 않다는데 있지 않다. 에른스트 카시러의 어휘를 빌려 말하자면 침팬지의 신호는 인간의 기호가 지닌 상징성(symbolism)’을 결핍하고 있다. 인류가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고도의 문화적 유산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모든 지각 현상으로부터 의미를 추상해내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 소통해온 덕분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오늘날 우리가 철학, 종교, 예술 같은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것은 인간적 소통의 열쇠인 기호체계를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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