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의 유동성과 의미의 천착 Art criticism

기호의 유동성과 의미의 천착

 

강 미 정 (서울대 융합기술원)

주세균의 <Dinner>(2015)는 서울에 사는 작가가 고향의 가족과 함께한 식사시간을 담은 것이다. 평범한 가정의 저녁식사는 마치 신성한 의식(ritual)인양 어머니의 기도로 시작된다. 이어 정성스레 저녁메뉴를 준비하는 어머니의 손길이 화면에 펼쳐지고 하얀 백자기에 담긴 음식들이 식탁에 놓인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작가 자신, 세 명의 가족이 마주 앉아 음식을 함께 나누는 장면은 평범한듯하면서도 평범하지 않다. 여느 한국 가정에서나 있을 법한 식사장면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영상에 삽입된 자막이다. “어머니가 정의감에 불을 붙이셨다,” “노력정직함은 정성으로 반죽된다,” 같은 자막은 작가의 영상제작 과정을 알지 못하는 관객에게 전혀 해설능력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오히려 암호에 가깝다.

<Dinner>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Text Jar> 시리즈를 제작한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세균은 ‘effort’‘challenge’처럼 특정한 가치를 담지한 단어의 컬리그래피를 회전시켜 환을 만들고 그 형태를 그대로 도자기로 제작했다. 이때 각 단어를 이루는 알파벳의 부분이 그릇의 전체 형태를 결정하게 된다. 작가는 <Dinner>에서 각 단어의 뜻만큼이나 다른 형태를 지닌 백자기들을 가족식탁에 올린 것이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아들에게 부모는 과거의 화신이다. 부모와의 저녁식사는 마치 타임머신처럼 작가를 과거와 상봉하게 하고 오래전 식탁에서 배웠던 교훈들을 떠올리게 한다.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도전적이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 <Dinner>에는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과 현재의 기억, 보편적 규범과 개별적 현실, 그리고 공적인 기호와 사적인 의미가 교차하며 뒤섞여 있다.

주세균을 세상에 알린 작업은 <국기>(2010-2012) 시리즈다색모래흑연가루베이비파우더 같은 가변적인 재료로 만든 만국기 작업은 몇몇 비평가들이 티벳 라마승의 만다라 제작에 비유할 정도로 구도자적 집요함과 끈기를 요하는 것이었다. <Notional Flag>(2011)는 여러 지점에서 아이러니컬해 보인다각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의 견고한 의미를 쉽게 흐트러질 가루들로 표현했다는 점몇 가지 색상과 도형으로 표상된 국가(nation)가 짐짓 실체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나 실상 개념(notion)에 불과하다는 점오랜 시간을 들여 구도적 자세로 구현한 이미지들이 한순간에 가루더미로 환원된다는 점 등이다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례규준상징은 얼마나 보편성을 띠는 것일까그것들은 얼마나 확고한 것일까주세균은 이렇게 술회한다. “현실에서 목격되는 많은 사건들은 기존에 내가 배우고 익힌 다양한 기준의 근거들을 혼란스럽게 한다모든 것들이 의심스러운 이 사회에서 의미들은 움직이고 정의들(definitions)’은 기준이 없어 보인다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 대한 지성과 현실의 현상이 접점으로 교차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는 기성의 기준’ 또는 규범을 뒤틀어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작업을 통해 그 자신만의 의미체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Tracing Drawing 68>(2012)은 전통 도자를 소재로 한 비틀기 작업이다. 그는 인터넷에서 채취한 보물이나 국보급 도자기의 이미지들을 하얀 자기 위에 연필로 베껴 넣었다. 그의 드로잉이 고도의 정밀묘사였음에도 자기의 형태와 표면 이미지 사이엔 괴리가 생긴다. 애초에 <Tracing Drawing 68>의 제작을 위해 작가가 여러 출처에서 도자기 사진을 수집하여 조합했기 때문에 베껴진 이미지는 원작의 외관과 다소 거리가 있다. 또한 둥근 항아리에 평편한 이미지를 투사한 결과, <Tracing Drawing 68>은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으로 지각된다. <Tracing Drawing 68>은 소재가 매우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국기>와 매우 유사한 아이러니를 빚어내고 거의 동일한 질문을 제기한다. <국기>에서 의문시했던 것이 현행의 제도였다면, 이번엔 과거의 전통이다. 작가는 더 견고한 가치를 찾아 다변적인 현대미술을 등지고 전통 도예로 향했었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건 전통적 가치는 과연 보편적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현행 제도나 과거 전통 모두 개인이 좌우할 수 없는 사회적 규약이기에 그 의미가 명확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통용되는 기호가 개인적 현실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은 일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모호할 수밖에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이들이 경험하는 공적 규범과 사적 현실의 괴리에 작가는 더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사회적 의미 규준이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의미와 의미체계 자체에 대한 천착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의미,’ ‘기준,’ ‘정의의 사전적 정의를 베이비파우더와 모래를 이용하여 전사한 2010년의 <Black Sign> 시리즈는 기호와 의미작용에 대한 그의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잘 드러낸 초기작이다.

주세균 작업의 문제의식은 전통과 규준, 기호와 재현, 인식과 오인(misrecognition)으로 압축할 수 있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말대로 하나의 기호를 구성하는 두 요소 즉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자의적이라면(arbitrary), 국기로 대표되는 국가라는 제도나 국보 제68번이라는 규정은 우리가 가진 통념만큼 그렇게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소쉬르는 자신의 기호학적 언어학 연구를 사회심리학의 한 부분으로 규정했다. 이 심리학적 학문에선 특정한 개념(기의)이 특정한 소리(기표)에 의해 지시되는 원리가 사회적 관습에서 유래했다고 간주된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국기나 국보라는 기호가 지닌 권위는 영원할 수 없고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호나 재현이 불변의 가치를 담지하고 있진 않다는 판단은 개인적 사고과정에서 발생한다. 찰스 S. 퍼스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개별적 해석활동을 고려한 기호이론을 제시하였다. 하나의 기호가 어떤 대상을 지시한다는 사실은 누군가의 해석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다. 관습적 해석방식이 주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기호에 대해 각 사람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똑같을 수 없다. 더욱이 사회적 제도나 관례가 본래 유동적인 것이라면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받아들인 의미를 마냥 틀렸다고만 할 수도 없다. 다만 사회 내 존재로서 개인이 어느 시점에 어떤 근거에서 유동하는 기호의 의미를 일시적으로나마 정박시키느냐의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사회적 의미작용의 불확정성은 개인적 인식의 불완전성을 초래한다. 자크 라캉이 잘 지적했듯이 우리의 인식 또는 이해는 기본적으로 오인 내지는 오해에 기초한다. 주세균이 자주 활용하는 착시 유도 장치는 이러한 인식의 불완전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는 <Notional Flag>에서 시작된 착시 유도 트릭을 후속 작업에서 거듭 사용하고 있다. 국기처럼 보이나 실제 국기를 왜곡시킨 <Notional Flag>처럼 <Tracing Drawing 68>는 국보 제68호와 꼭 닮은 듯하지만 실제로는 변형되어 있다. <무궁화 패턴>시리즈는 마치 전통 도자기 문양을 그대로 재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초문과 무궁화를 혼합하여 작가가 창안한 것이다. 2013년 개인전에서 전시한 <Moon Jar> 시리즈 역시 눈속임에 기초하고 있다. 마치 백자처럼 보이는 달항아리는 실제로 흑자의 표면을 흰 분필과 크레용으로 칠한 것이다. 거울을 이용하여 그릇의 부분으로 전체 형상을 표현한 <Untitled (Mirror, Inlaid pottery)>(2014) 시리즈 역시 인간의 불완전한 인식 기제를 암시한다.

주세균은 근작 <Dinner>에서 종전과 달리 공적인 기호체계보다 사적인 의미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의 관심은 처음부터 사회적 규준 못지않게 개인적 현실에 닿아 있었다. <국기> 시리즈의 재료인 베이비파우더, 모래, 분필은 모두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과 밀착되어 있다. 그가 일찍이 도예에 발을 들인 데는 전통에 대한 관심 외에 다도를 하시는 어머니의 영향도 한몫 했다. 작가 개인의 기억이 재현된 텍스트 그릇들이 진열된 <Cupboard>(2015)2007년 자신만의 그릇들을 수집하기 위해 제작한 <My Cupboard>의 반복처럼 보인다.

주세균은 접점 찾기,” “조율 또는 합의과정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공식화된 문화가 강요하는 의미를 개인화하는 방식을 모색해 왔다. 그 방식은 과거의 전통과 현재의 기억, 보편적 규범과 개별적 현실, 또는 공적인 기호와 사적인 의미를 함께 엮어 새로운 의미체계를 제시하는 쪽을 향하고 있다. <Dinner> 등 영상작업을 포함한 <Text Jar> 시리즈는 종전의 <국기> 시리즈나 <Tracing Drawing> 시리즈에서 했던 기성 의미체계의 모방 및 변형작업과는 달리, 그야말로 새로운 의미체계의 생산작업이기 때문에 주세균의 예술 노정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될 것 같다. 공적 영역의 소통체계에 의문을 던지는 동시에 공식 문화를 개인적 의미세계 안에서 소화하기, 더 나아가 자신만의 의미체계 만들기는 작가가 이제껏 천착해온 화두였다. 이처럼 묵직한 화두를 국기, 패턴디자인, 도예, 컬리그래피의 넓은 스펙트럼의 주제들을 통해 실험해온 주세균이 <Text Jar> 시리즈 이후 어떤 행보를 이어갈지 궁금하다. 파우더 설치나 전통 도자문양의 정밀한 모방, 텍스트를 형상화한 그릇빚기 등에서 보여준 수공의 노고와 학부 시절부터 씨름해온 유동하는 기호에 대한 사유에서 작가의 성실성이 진하게 전해지기에 앞으로 보여줄 그의 작업이 자못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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